1951년 인도 뉴델리에서 걸음마를 시작한 ?아시안게임이 8월 자카르타·팔렘방을 기해 19번째 돌을 ?맞는다. 1962년 이후 56년만에 이 대회와 다시 인연을?맺은 자카르타는 한국 배구에게도 매우 각별한 장소로 다가온다. 한국 남자 국가대표팀(6인제)이 아시안 게임에 데뷔한 무대가 바로 자카르타이기 때문이다(9인제 대표팀은 이보다 4년전인 1958년 도쿄아시안게임에 첫 선을 보였다).
이렇듯 한국배구 역사에 뜻깊은 대회이기에 배구계가 이번 아시안게임에 보내는 관심은 여느 대회보다도 훨씬 높아 보인다. 대표팀이 내놓은 각오 역시, 지난 진천선수촌 미디어데이에서 김호철 감독이 내놓은 출사표를 통해 전해진 바 있다.
물론 현재 대표팀에 조성된 분위기를 이해하려면 병역특례를 필두로 한 여러가지 ‘당근’들을 빼놓고 생각할 수 없다. 이번 아시안게임 우승이 한국배구계 전체의 지상과제로 대두된 데에는 ‘병역특례’와 같은 특정·지엽적 요소보다 절박하고 중차대한 이유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 이유가 이번 대표팀의 성격자체를 규정하는 주 요소이기도 하다.
왜 아시안게임 우승에 목매나
그렇다면 과연 그 이유, 즉 한국 배구계가 이번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절실하는 바라는 까닭은 무엇일까. 나아가 우승을 통해 기대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 두 가지 의문을 풀어내기 위해 한국배구가 국제 경쟁력을 잃기 시작한 시점 및 그 시기부터 현재까지 대표팀이 어떤 과정을 거쳐 왔는지에 대해 다소간 설명이 필요하다. 잇따른 국제대회의 실패로부터 초래된 그 ‘이유’가 바로 한국배구의 위기로부터 싹을 틔워 이제까지 성장해 온 산물이기 때문이다.
시계를 앞으로 돌려보자.
대표팀의 국제 경쟁력 저하를 알리는 경고음이 처음 울리기 시작한 때를 거슬러 올라가면, 아마 2010 세계선수권대회?아시아지역 최종예선 즈음에 닿게 될 것이다. 후에 ‘무사비 쇼크(그에게 85%(17/20)’의 공격성공률에 더해 블로킹 3개 포함 총 20점을 허용했다)로 명명된 이란전 역전패로 인해, 한국은 1974년 세계선수권대회에 첫 출전한 이래?타의에 의한(1986, 2002년에는 자진불참) 본선진출 좌절을 처음 맛보게 된다.
사진 : 김호철 한국남자배구대표팀 감독
남자배구 위기론의 역사적 연원
이 대회를 ‘한국배구 위기론’이 처음 수면 위로 떠오른 시기로 보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2008년 AVC컵에 이어 다음 해 열린 세계선수권대회 예선에서 연이어 이란에 무릎을 꿇음으로서, 그간 동북아?3개국의 세력균형 구도 안에서만 아시아를 인식하던 한국의 배구관이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둘째,?외국인 선수제도 도입이후 V-리그에 급속도로 확산되던 기형적 전술(속칭 ‘몰빵’)이 바야흐로 대표팀 수준에서 가시적으로 영향을 끼친 첫 사례였기 때문이다.
한국배구는 당시 격변하는 국제배구의 흐름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한국배구는 그 댓가를 혹독하게 치러야 했다. 2014년 세계선수권대회 본선에서 AVC회원국 중 유일하게 2라운드 진출에 실패하는 망신을 당했다. 이듬해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선 급기야 7위로 곤두박질쳤다. 그 결과 올림픽 최종예선에 출전조차 못하는 사태를 맞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2016년 월드리그 개막을 두달 남짓 앞두고 빚어졌던 파행적인 대표팀 감독교체 상황은 배구팬들에게 큰 실망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당시 대표팀 감독은 단년 계약제였다. 엄밀하게 보면 4개월 남짓한 임기가 고작인 감독 체제 아래에서 중·장기적 강화·발전 방안의 추진과 시행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이러한 여건에서 당면한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서는 20대 초중반 선수들의 젊음과 패기보다보다 한선수-문성민-신영석같은 경험많은 선수들을 우선 순위에 놓는 게 당연했다. 2015년 문용관 감독으로부터 2017년 김호철까지 3년 간 대표팀이 내내 정체상태에 놓였던 근본적인 이유는, 이러한 시스템에 내재된 한계때문이었을 것이다.
2016 리우올림픽 최종예선 출전무산-2017 세계선수권 예선 탈락-2018 VNL 최하위·강등으로 이어진 3년간 대형 참사들은 별개 요인에서 벌어진 독립 사건이 아니라 누적된 ‘한국배구의 폐단’이라는 하나의 요인이 단지 시간만 달리해서 발생한 현상으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또한 이를 통해 한국배구계가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바라는 이유 혹은 우승으로부터 기대하는 효과를 추측하면, 곧 ‘세간의 주목도가 높은 대규모 스포츠 이벤트에서 호성적을 통해, 지금까지 드러난 한국배구의 각종 병폐들에 대한 책임을 얼마간 희석시키거나 무마, 혹은 은폐’ 하고자, 또는 바라고 있다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같은 한국배구계의 ‘셈’은 아시안게임 금메달 획득이라는 전제위에서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평가 및 견해를 제시하기에 앞서, 아시안게임 주요 경쟁국들의 동황을 점검하고, 이를 통해 한국의 아시안게임 금메달 가능성을 타진해 보는 게 필요하다.
사진 : 아시안게임에 정예 멤버로 나서는 이란
아시안게임 경쟁국: 이란·중국·일본 전력은
한국이 금메달을 획득하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할 상대인 이란, 중국, 일본 등을 중심으로 간략히 살펴보자.
이란은 리우 올림픽 이후 다소 정체기를 겪었다. 최근 포르야 얄리(Porya Yali), 모르테자 샤리피(Morteza Sharifi)등 2017 세계U19대회에서 우승한 재원들을 성인대표팀에 합류시키며 세대교체를 통한 체질개선을 적극 시도하고 있다. 이란은 당초 세계선수권대회와 아시안게임을 A, B팀으로 나누어 운영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아시안게임 폐막일과 세계선수권 첫 경기까지 열흘 가량 휴식기가 있다는 점 외에 부상자들이 다수 생기자 전략을 수정했다. 두 팀 모두 경기력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유지할만한 선수층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해, 두 대회 모두 최정예인 A팀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중국은 2017년 궈첸시에(Guochen Xie)로부터 라울 로자노(Raul Lozano)로 감독을 교체하는 한편 1988년 이전 출생한 모든 선수들을 대표팀에서 제외하는 과격한 방식의 개편을 단행했다. 올해 VNL에서는 대표팀 로스터의 평균연령을 24세까지 끌어내리며 ‘젊은 팀’이란 기조에 한층?힘을 실었다.
다만 이번에? 출전하는 팀은 장첸, 즈홍 웨이준, 리 룬밍등 리우 최종예선 멤버에 리 루이, 장 궈준등 30세를 전후한 선수들을 주축으로 삼았다. 한국이 지난 6월 장충체육관에서 만났던 그 팀과는 성격이 사뭇 달라졌다고 볼 수 있다. 리우올림픽 최종예선에 출전시킨 팀을 모델로 삼은 것으로 보이는데, 서브와 수비에 상당한 강점을 지녔던 팀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2017년 월드리그를 앞두고 나카가이치 유이치-필립 블랑(Philippe Blain)의 지도체제를 출범시킨 일본은 그해 후지이 나오노부, 리 하쿠, 오타케 잇세이 등을 새롭게 등용한 데?이어?올해?VNL에서는 186cm의 아포짓스파이커인 니시다 유지(18)를 발굴하는?등, 매년 큰 폭의 인적쇄신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선수층의 잦은 변동에도 불구하고 빠른 템포를 추구하는 팀 컬러는 유지되고 있고, 이번 아시안게임에서도 큰 변화가 없을 것으로 본다.
일본 역시 세계선수권대회와 아시안게임의 분리운영을 발표했다. 작년까지 A팀에 속했던 세터 후카츠 히데오미, 미들블로커와 아포짓스파이커를 오가던?데키타 타카시가 아시안게임으로 향하는 B팀에 배정된 것이 눈에 띈다. 이밖에 도요타 고세이의 주장인 타카마츠 타쿠야와 미들블로커 덴다 료타도 요주의 대상이다.
이상 한국과 경쟁할 3개국의 공통점 한가지를 더 짚자면 이고르 콜라코비치(Igor Kolakovic), 라울 로자노, 필립 블랑등 외인감독을 영입한 것 외에 그 선임 시기 또한 비슷하다는 점이다. 이는 이들 세 나라가 세계배구와 소통하는 방식은 물론 그 시기에서도 일정한 공감대를 지니고 있음을 방증한다.
사진 : 중국 라울 로사노 감독
이들 국가 외에도 최근 성장세가 두드러지는 카자흐스탄과 카타르, 2015년 이후로 조직력과 개인 기술면에서 부쩍 향상된 모습을 보이는 대만, 작년 아시아선수권 4위에 오른?개최국?인도네시아도?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상대다. 특히 이들 모두 아시안게임에 전력투구할 것이라는 점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위에 언급한 경쟁국들의 현 상황과 신영석의 합류무산 등 한국의 전력 손실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때, 한국대표팀의 아시아게임 행보는 그리 순탄치 못하리라 예상된다.
그러나 일본, 중국 등 경쟁국들의 베스트 팀이 참가하지 않는 관계로 여타 대회에 비해 우승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아진 것은 분명하다. 아울러 한국배구계가 전통적으로 아시안게임에 부여해 온 특별한 가치, 선수들의 강한 성취동기를 떠올려보면, 대회 시작도 전에 지레 포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선택과 집중이란 전략의 옳고 그름은 논외로 하더라도, 그것이 아시안게임에서 실효성을 갖는 개념인지 대해선 그리 긍정적인 답을 내놓기 어렵다. 아시안게임에 출전하는 팀들 수준에 눈높이를? 맞추어 준비해 온 팀이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 등 줄곧 세계를 목표로 팀을 꾸려온 상대들을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대표팀이 아시안게임 우승을 바란다면,?역설적으로 그보다 더 높은 수준의 팀들이 경쟁하는 무대에서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며 힘을 키워야 한다’는 말로도 바꿔 쓸 수 있겠다.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우승 이후, 이란대표팀의 마루프는?“우리는 이 우승을 위해 4년을 준비했다”고 말한 바 있다.
그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6강에 오른 팀이, 그저 아시안게임 하나만을 바라보고 팀을 만들어 왔을까.
결코 아닐 것이다. 그의 말에는 “(그 기간동안) 우리는 세계를 겨냥해 팀의 역량을 끌어올렸고, 바로 그 결과로 이번 대회 챔피언 자리에 오를 수?있었다”라는 진의가 함축되어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제 ‘아시안게임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할 때다. 아시안게임 금메달이 절실할수록 더욱 그래야 한다. 세계를 겨냥하지 않으면 아시아에서도 정상에 설수 없는 시대가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다. ‘
글/ 조훈희 더스파이크 칼럼니스트
사진/ FIVB
(위 기사는 더스파이크 8월호에 게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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