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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녀 슈터요? 과분하지만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아라유 0

[김종수의 농구人터뷰(81)] '미녀 슈터' 김연주

 

 



“미녀 슈터요? 솔직히 말하면 이래저래 과분하죠. 미녀라는 말도, 별명으로 슈터가 붙은 것도 모두 과분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감사하고 영광스런 마음도 큽니다. 오랜시간 활약했어도 확실한 별명하나 붙지않은 선수도 많잖아요. 저같은 경우 주로 식스맨으로 뛰었음에도 저런 멋진 별명을 지어주셔서 두고두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가만히 제 농구 인생을 돌이켜보면 저는 운이 참 좋은 선수 가운데 한명같아요”

'미녀 슈터'라는 별명으로 인기를 누렸던 김연주(37‧178cm)는 자신의 농구 인생에 대해 '운이 좋았다'라는 말을 자주 언급했다. 스스로를 가리켜 ‘3점슛 원툴’이라고 겸손하게 표현하고있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 학창시절 그리 잘나가지 않았음에도 3학년때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전체 2번이라는 높은 순위에 뽑힌 것을 비롯 신한은행 한팀에서 원클럽 우먼으로 선수 생활을 마친것도, 14시즌동안 프로 커리어를 이어간 것도, 기량이 어느 정도 살아있을 때 자신의 의지로 은퇴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운이 따랐다고 긍정적으로 돌아보고 있다.

어찌보면 매일 매일이 치열한 경쟁의 연속인 엘리트 스포츠 세계나 프로 무대서 단순히 운이 좋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느 정도 운이 따르는 경우는 있지만 치열하게 노력하고 준비하지 않으면 설사 좋은 기회가 온다해도 잡을 수 없다. 김연주는 일찍부터 자신이 잘하는 영역을 알았고 거기에 대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기에 팀이 자신을 부르는 순간 코트에 나가 거기에 응답할 수 있었다.

인터뷰하는 내내 느꼈던 것은 그녀의 농구에 대한 진심과 강한 멘탈이었다. "어차피 저는 대단한 스타가 아니었기에 어떤 상황이 와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시련이 찾아와도 흔들리지 않았던 것은 이른바 '수긍의 힘'이 컸다. 농구로서 프로까지 온 선수의 대부분은 학창 시절 에이스나 그에 준하는 위치를 경험해본 선수들이다.

때문에 갑작스럽게 출장시간이 줄거나 기회가 잘 주어지지 않으면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는 등 스트레스를 크게 받기 일쑤다. 김연주는 달랐다. 선일여고 1학년때까지도 팀내 핵심과는 거리가 있어서 상대적으로 그런 자부심이 적었다고 한다. 스타팅 멤버는 낯설었고 벤치에서 박수치고 응원하는 쪽이 더 익숙했다. 그런 시절을 경험하다보니 프로에 와서 초반에 기회를 잘 받지못하던 시절에도 견딜 수 있었던 힘이 됐다고 한다.

“너무 좋게 말씀을 해주시는데 사실 저는 당시 상황을 포장하고 미화하는 등 그러고 싶지는 않아요. 그냥 실력이 부족해서 벤치에서 대기했고 저역시 현실을 알기에 상황을 받아들였을 뿐이에요. 물론 그렇게 끝낼 수는 없었기에 제가 잘하는 것을 열심히 갈고 닦았고 코트에 나가서는 역할에 충실하려고 노력했습니다”

◆ 김연주 정규리그 통산기록 ☞ 통산 353경기 출전 평균 4.71득점, 1.76리바운드, 0.75어시스트, 0.59스틸 , 0.21블록슛

◆ 김연주 플레이오프 통산기록 ☞ 통산 45경기 출전 평균 3.24득점, 1.22리바운드, 0.29어시스트, 0.20스틸, 0.07블록슛

​⁕ 정규리그 한경기 최다기록: 득점 ☞ 2012년 3월 3일 KB스타즈 = 22득점 / 3점슛 성공 ☞ 2012년 3월 3일 KB스타즈 = 6개 / 어시스트 ☞ 2012년 10월 31일 하나원큐 = 6개 / 리바운드 ☞ 2012년 3월 3일 KB스타즈 = 11개 / 블록슛 ☞ 2010년 12월 10일(외 1경기) KDB생명 = 3개 / 스틸 ☞ 2010년 12월 10일 KDB생명 = 6개​


 

 



​“양희종 선수가 이상형이라고 보도 된적이 있어요. 사실은요…”

​​​​Q.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농구 강사일을 하고있고 시즌에는 WKBL 해설도 하고있고 그래요. 강사일같은 경우 엘리트쪽은 아니고요. 위밋업스포츠(wemeetupsports)에서 농구를 많이 접해보지않은 일반 성인여성들, 신체활동이 부족한 아이들 그런 분들을 대상으로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쪽에 초점을 맞춰서 하고있어요.

​​​​Q.인기가 무척 좋으실 것 같은데 아직 결혼을 안하셨어요.
사실 저뿐 아니라 제 나이쯤 되는 남녀 성인들이 주변에서 가장 많이 받는 질문중 하나일 것 같아요. 뭐, 다들 궁금하시니까 물어보실 수는 있겠지만 뭐라고 답변해야할지 참 어려워요. 아직 인연을 못 만났다고 밖에는 대답할 말이 없어요. 딱히 할 말이 없는데 물어보시는 분들은 많고…, 그냥 이후에라도 좋은 인연만나게되면 그때 축하해주시면 더욱 감사할 듯 싶어요.

​​​​Q.언젠가 유투브에서 이상형에 대해 말하는 것을 봤는데 ‘잘생긴 사람’이라고 대답했어요.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겠지만 어떻게 생긴 사람이 잘 생긴 것일까요?
네. 맞아요. 잘생긴 사람이 좋아요.(웃음) 이런 부분은 그냥 빙빙 돌리지 않고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디테일하게 이렇게 저렇게 생겨야 좋다가 아닌 딱 봤을 때 잘생긴 사람이 잘생긴게 아닌가 싶어요. 누구나 아는 분들로 예를 들자면 조인성, 정우성님 등…, 조인성같은 경우는 선수 때부터 잘생겼다고 생각했어요. 개인적으로 아는 것은 아니지만 딱 봤을 때 정말 잘생긴 분들 아닌가요. 제가 뭐라고 막 평가하고 그런 것은 아니고요. 그냥 개인적인 생각일뿐입니다.

​​​​Q.얼마전 은퇴한 양희종 선수의 팬이라고 밝히기도 했어요.
선수로서 플레이 스타일의 팬이라고 어릴 때부터 종종 언급한적 있는데, 유투브 방송을 보면 너무 잘생겨서 좋아한다는 식으로 오해할 수도 있겠더라고요. 물론 너무 멋진 분이시지만 제가 팬인 것은 외모보다는 경기하는 것에서 동경하는 마음이 컸어요. 제가 고등학교때 대학생이셨는데 그때도 수비를 정말 잘하셨어요. 지금은 잘 안쓰는 방식이지만 당시 원쓰리형 수비에서 밑선을 맡으셨던 것을 봤어요. 사실 그러한 형태의 수비에서 밑선을 맡으면 정말 힘들거든요. 그런데 너무너무 잘하시는거에요. 커버도 적절할 때 잘 들어가시고해서 대단하다고 느꼈던 기억이 나요. 그래서 운동선수로서 팬이 됐는데 그게 이후에 살짝 와전되어서 이상형같이 표현되어서 나갔더라고요. 깜짝 영상 카메라 형식으로 나갔는데 보신 분들은 아마도 그렇게 느끼셨을 수도 있겠다 싶어요. 양희종 선수가 멋진 것은 완전 인정이지만 어디까지나 팬과 이상형은 다른데요.(웃음)



 



​​​​Q.영상 찍을 때 살짝 당황하셨을 듯 싶어요.
조금요.(웃음) 저한테 전혀 얘기가 안된 상태에서 불쑥 들어오니까 당황스럽기는 했죠. 영상 막판에 깜짝 선물처럼 준비하시는 것 같은데, 그렇게 스토리가 돌아가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장단을 맞췄죠.(웃음) 그렇게 해주셔서 감사하기는한데 전혀 예상치못한 부분이라서…, 하지만 나름 신선한 컨셉이었고 팬들에게도 재미있는 소재일 듯 싶어서 좋은 추억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Q.보통은 자신과 플레이 스타일이 비슷하거나 화려한 유형의 선수를 좋아하는 경우가 많던데 수비를 보고 양희종의 팬이 되었다고 하니, 농구에 대한 진심이 느껴집니다.
하하핫…,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요. 그냥 제가 선수 시절 내내 수비가 약하다는 지적을 꽤 받았거든요. 제가 잘하지 못하는 부분에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분이라 존경하는 마음이 깊어지지 않았나 싶어요. 박정은 선배님같이 같은 포지션에서 일가를 이룬 분도 좋지만 플레이적인 면에서는 못하는 부분에서 잘하는 분들이 깊게 남더라고요. 수비도 정말 영리하게 잘하시고 허슬플레이 등에서도 과감하고, 여러 가지 부분에서 따라해 보려고도 했는데 하면할수록 어려운 영역이구나 하는 것도 느꼈어요.

​​​​Q.어쩌다보니 미남 미녀 질문을 자꾸하게 되네요. 두가지만 더해볼께요. 그럼 남자 농구선수중에서 가장 잘생겼다고 생각하는 인물로는 누가 있을까요?
진짜 모르겠어요. 다들 키도 크고 멋진 분들이 정말 많잖아요. 누구를 콕 찍어서 지정하기는 어렵네요. 다만 연예인들과 달리 선수는 플레이로 말을 하는 만큼 잘하는 선수가 멋있어보이고 아우라도 느껴지고 그런 것 같아요. 농구선수는 이른바 농구빨이라는게 있지않을까요? 그래야 더 공평한 듯 싶고요.

​​​​Q.그럼 마지막 외모 질문입니다. 역대 여자 농구선수 중에서는 누가 가장 미녀라고 생각하나요?
흠…, 이건 저라고 할께요. 너무 괜찮은 선후배들이 많기는하지만 순위를 매길 수가 없어요. 만약 투표를 한다면 팬분들의 의견도 가지각색일 것 같고요. 이럴 때는 그냥 저입니다. 많이 돌 던져주세요.(웃음)

​“라면을 참 좋아해요. 그중에서 제일 잘먹는 라면은 ㅇ라면이에요”

​​​​Q.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슈터중에서 유독 ‘미녀’라는 별명이 붙은 선수가 많은 것 같아요.

생각해보니 그렇네요. 아마도 포지션이나 역할의 영향도 있지않을까 싶어요. 경기 사진을 예로 든다면 센터나 파워포워드같은 경우 골밑에서 몸싸움도 거칠게 하고 그러다보니 인상을 과하게 써서 순간적으로 얼굴이 구겨지게 찍히는 경우도 많아요. 표정관리하면서 경기를 할 수는 없으니까요. 슈터도 편한 자리까지는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그런 경우가 적다보니 굴욕샷이 덜 나오지 않나 싶어요. 주로 슛 쏠 때 찍히다보니 멋진 사진이 많이 나오죠. 가드들도 작전지시할 때 괜찮은 샷이 만들어지기도 하고요. 선수들끼리도 가끔 그런 얘기를 했던 기억이 나요.


 

 



​​​​Q.농구 외에 취미는 있으실까요?
취미는 그때그때 바뀌는 편이에요. 막 뭔가 하나에 빠져들고 그런 정도는 아니고요. 그냥 소소하게 이것저것 즐긴다고 해야할까요. 아! 드라마 보는 것도 좋아해요. 더 글로리도 재미있게봤고요. 그런데 볼 때는 무척 잘보는데 나중에 기억하려면 뭘봤지 싶을 때도 있어요. 매니아처럼 복기하면서 보는 편은 아닌가봐요. 그리고 무슨 취미가 있지? 막상 말하려니까 생각이 잘안나네요.

​​​​Q.보니까, 농구만 진심이고 나머지는 정말 소소하게 즐기시는 편인 듯 싶어요.
하핫…, 그렇지도 않아요. 농구같은 경우 은퇴하고 나니까 더 애틋해지고 감사한 부분도 있어요. 농구할 때는 즐겁기도 했지만 힘든 순간도 많았어요. 비교가 좀 그렇기는 하지만 고3 수험생들보면 당시는 승부욕도 불타지만 힘들 때도 적지않잖아요. 하지만 나중에 대학도 가고, 사회 생활도 하다보면 그 시절이 한번씩 생각날 때가 있고, 그런? 근데 모든 승부를 겨뤄야하는 업종이나 종목이 다 그렇지않나요. 좋을 때와 힘들 때가 공존하면서 또 그렇게 흘러가는…, 농구하던 시절을 추억해보면 그런 것 같아요.

​​​​Q.요새 스포츠 스타 출신들의 방송 출연이 많은데, 의외로 예능 등에서는 모습을 뵙기가 힘들어요. 출연제의는 많이 들어오는데 거절하시는 것일까요?
그렇지도 않아요. 제의도 많이 들어오지도 않았고요. 저도 예능 등에 욕심이 있고 그러지는 않아요. 끼가 많거나 저를 어필하고 그런 성향도 별반 없어보여요. 그냥 저는 조용히 제가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사는게 제일 좋을 것 같아요.

​​​​Q.예전 현역 시절에 동료들 사이에서 ‘식신’이라고 불릴 정도로 잘먹는다고 들었던 기억이 나요.
정확히 말하면 잘 먹었었죠. 위도 나이를 먹나봐요.(웃음) 지금도 못먹는 것은 아니지만 현역때와 비교하면 차이가 좀 나요. 30대로 들어오면서 먹는 양이 확실히 줄기는 했어요. 나이적인 부분도 있겠고, 아무래도 선수 시절에는 운동량이 많으니까 많이 먹어도 다 커버가 됐죠. 하지만 지금은 그때처럼 먹을 수 있다고해도 그렇게 먹는다면 큰일나겠죠?

​​​​Q.라면 매니아로도 유명해요. 라면은 계속 드세요?
네, 제가 워낙 라면을 좋아하는 편이라서요. 하지만 매니아라고 하기에는 부족할 듯 싶어요. 그냥 라면을 잘먹는 것이지 이것저것 라면에 대한 정보가 풍부하다거나 나만의 레시피를 가지고 끓여먹고 그러지는 않아요. 특징이 있다면 매운 라면을 좋아한다 그 정도?

​​​​Q.저도 개인적으로 라면을 좋아하는데요. 수십년간 이것저것 다 먹어봤지만 언젠가부터 가장 좋아하는 라면이 한 개로 압축되더라고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저만의 최고 라면은 바로 ‘스낵면’입니다. 별다른게 첨가되지않은 순수한 그 자체의 라면 맛이 좋더라고요.
오~ 정말요? 스낵면이 그정도인가요? 저같은 경우는 ‘열라면’이에요. 너무 맵지도 않고 적당히 알싸하게 매운 맛도 좋고 면도 꼬들꼬들하고 제 입맛에는 딱이더라고요. ㅌ라면도 좋지만 후추맛이 강한 것 같아서 제 입맛에는 열라면이 더 좋아요.

​​​​Q.맛있게 매운 열라면~ 광고 들어오면 좋겠네요.
하하핫…, 너무 좋겠네요.(웃음)



 



​“김영희 선배님을 통해 여러 가지를 느끼고 배웠습니다”

​​​​Q.거인병으로 고생하던 고 김영희님을 여러 뜻있는 분들과 함께 찾아뵙기도 했어요.

WKBL 선수 복지회라고 있어요. 따로 공식적으로 운영되는 것은 아니고요. 일종의 모임같은거에요. 취지가 좋은것 같아서 저도 함께하고 있었죠. WKBL에서도 관심을 가져주고 계시고요. 개인적으로 무엇을 하지는 못했어요. 다만 복지회 멤버로서 함께 찾아갔던것 뿐이에요. 3번 정도 찾아뵈었는데 얼마전 너무 빨리 하늘나라로 가셔서 많이 놀라고 안타깝고 그랬습니다. 저는 하자는 것을 따라간 정도고요. 김보미 WKBL 경기운영부장님과 이종애 복지위원장님이 많이 애써주셨죠. 사실 이렇게 얘기하니까 뭔가를 크게 한 것 같은데 그런 것은 절대 아니고요. 아주 작은 정성을 조금씩만 모아서 찾아갔던 것 뿐이에요. 사실 저는 언니들을 따라간 정도에 불과한지라 답변을 드리면서도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이 큽니다.

​​​​Q.‘농구人터뷰’에서도 김영희님을 다룬 적이 있는데 정말 소녀처럼 순수하고 넓은 마음이 느껴졌던 기억이 납니다.
솔직히 말해서 처음에는 걱정도 좀 했어요. 워낙 대선배님이시기도하고 혹시라도 본의아니게 말 실수를 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 등등…, 하지만 직접 찾아가서 뵙는 순간 그같은 생각은 눈녹듯이 사라지더라고요. 정말 환한 표정으로 반겨주시고 편하게 말씀을 해주셔서 마치 예전부터 잘 알고 있던 언니같다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좋은걸 좋다고 바로바로 말씀해주시고 재미있게 대화를 이끌어가면서도 이런저런 배려까지 해주셨습니다. 감수성도 소녀처럼 풍부하시다고 느꼈어요. 여러 가지면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게 되었던 시간으로 기억되요.

​​​​Q.이래저래 너무 아쉽네요.
그렇죠. 저는 선배님과 시대가 달라서 무슨 말을 해야될지 모르겠지만 무엇보다 본인이 가졌던 병을 빨리 알아차리지 못한 부분이 제일 안타까웠던 것 같아요. 오히려 여러 가지 상황과 환경이 병을 더 키워버렸으니까요. 육체적으로 많이 힘들고 정신적으로도 괴롭고, 외롭고 그러셨을 듯 싶어요. 그러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않고 주변을 돌아보고 사람들을 배려해주시는 모습에서 더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저는 학창시절 라이벌이 딱히 떠오르지 않아요. 이유는요…”

​​​​Q.농구는 어떻게 시작하게 된 것인가요?

초등학교 3학년때 처음 농구공을 잡았어요. 당시 아버지가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계셨는데 농구부 부장을 맡고 계셨었고 방학 때만 잠깐 해보겠냐고 하셔서 거의 취미같이 시작하게 됐죠. 주변에서 예뻐해 주셔서 더 기분도 좋았고 그렇게 재미를 붙여 4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했다고보는게 맞을 듯 싶어요.

​​​​Q.어릴 때부터 키는 컸나요?
반에서는 큰 편이었어요. 하지만 농구를 시작하게되니 저는 아무 것도 아니더라고요. 정말 큰 선수들이 많았습니다. 갓 들어갔을 때 같은 학년 농구부에서 가장 작았으니까요. 저같은 경우는 키가 좀 늦게 큰 편이에요. 개인적으로는 전화위복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키가 작던 시절에 볼을 많이 만지는 훈련도 하면서 기본기도 어느 정도 닦아놓을 수 있었으니까요. 이른바 키빨을 받아서 농구를 하지않았으니까 성장에 도움이 된 듯 싶어요.

​​​​Q.신장이 크지 않았으니까 포인트가드 포지션도 맡고 그랬겠네요.
초창기에 하기는 했는데 오랫동안 하지 않았던지라 말 그대로 경험만 한 정도였어요. 제 한학년 아래가 이경은 선수에요. 그 친구가 어릴 때부터 운동신경도 좋고 볼을 다루는 능력도 되게 탁월했어요. 딱 포인트가드였던거죠. 그래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초등학교 5학년때 감독님께서 2번 슈팅가드로 전향을 시키셨어요. 그리고 그때부터 제가 슛 던지는 것을 좋아하기도 했고요.



 



​​​​Q.슈터라는 것은 타고 나는걸까요? 아님 만들어지는 걸까요?
타고나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해요. 보통 손끝 감각이라는 말을 종종 하잖아요. 그런 것을 무시할 수 없을 듯 싶어요. 물론 노력도 당연히 중요하죠. 하지만 슛감이 좋은 선수와 그렇지않은 선수가 똑같이 노력하게되면 시간이 지나면서 그 차이는 더 커지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패싱능력, 시야, 리바운드 등 다른 부분도 마찬가지겠죠. 그래서 지도자라 함은 잘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해당 선수가 어떤 쪽에 더 재능이 있는가를 잘 찾아주는 것도 핵심적인 포인트 같아요.

​​​​Q.슛 외에 잘하는 쪽으로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저도 선수인지라 이것저것 조금씩은 다 어느 정도 할 수 있었지만 잘한다는 기준으로 평가해보면 그냥 슛 원툴 선수였던 것 같아요. 그야말로 슛 하나로 먹고살지 않았나 싶습니다.(웃음) 진작부터 그것을 알고있어서 한 우물을 판 것이 그래도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고 생각해요. 그러한 장점을 잘 살려주는 지도자를 만난 것도 행운이었고요. 신한이라는 좋은 팀에 가서 기라성같은 선수들과 함께 뛰면서 다양한 플레이를 접하면서 다소나마 고르게 발전할 수 있었지만 지금도 가장 자신있는 플레이를 꼽으라면 슈터 밖에 없을 듯 싶어요.

​​​​Q.슈터는 외곽에서 받아먹기만해서 편하지 않느냐는 이들도 있지만 슛 한번을 쏘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움직임이 필요하다고 들었어요. 슛을 쏘는 것이 문제가 아닌 수비수를 제치는게 정말 힘들 듯 싶어요.
맞아요. 그냥 단순히 오픈찬스에서 슛만 던지는 것이라면 구태여 슈터급이 아니라고해도 다들 성공률이 꽤 나오지않을까 싶어요. 하지만 실제 경기에서는 격렬한 수비를 뚫고 슛을 던져야되니까 힘든거죠. 특히 저같은 경우는 3점슛에만 특화된 선수다보니 슛이 안들어가면 사실상 필요가 없어지는거잖아요. 팀에서 저에게 원하는 것은 시원한 외곽슛 한방이니 어떻게든 기회를 만들어서 쏴야하고, 적지않은 확률로 성공을 시켜야된단 말이에요. 문제는 상대팀이나 선수들도 그걸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다른 여러 가지 옵션이 위협적이면 수비수 입장에서는 이것저것 생각할게 많아지겠지만 저같은 3점 원툴 슈터는 외곽슛 봉쇄에만 모든 힘을 쏟을수가 있어요. 그러한 상황 속에서 3점슛을 터트려야되니까 더더욱 볼없는 움직임에 신경쓸 수밖에 없고 찰나의 순간 집중력을 최대치까지 끌어올릴 필요가 있었죠. 물론 그러한 과정에서 스크린, 패스 등 동료들의 도움도 많이 받았고요.

​​​​Q.학창시절 롤모델이 궁금합니다.
저같은 경우는 마이클 조던을 좋아했어요. 너무 멋있잖아요. 슛폼이나 이것저것 따라해보고 그랬던 기억이 나네요. 물론 따라한다고 될 선수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어린 마음에 좋아하는 선수처럼 저도 잘 되고 싶었던 듯 싶어요.

​​​​Q.그럼 학창 시절에 본인의 라이벌로 꼽을만한 선수로는 누가 있을까요?
솔직히 없었다고 보는게 맞을거에요. 제가 너무 잘해서 그런게 아니라 반대였던 이유가 커요. 저는 학창시절에 농구를 정말 못했어요. 때문에 프로에 간 것도 굉장히 감사한 일이죠. 겸손하려고 그러는게 아니라 사실이에요. 저는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는 벤치 멤버, 그중에서도 가장 마지막 선수였어요. 인원은 많지않았지만 8명중에 8번째 선수였어요. 특히 한 학년 위에 저랑 같은 포지션에 신체 조건은 물론 기량도 더 좋은 언니가 둘이나 있어서 경기에 나설 기회 자체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언니들이 고3때 아프면서 저에게도 차례가 돌아왔어요. 고2때 뛸 기회가 생겼다고 볼 수 있죠. 다행히 그때 잘하면서 프로 스카우터분들의 눈에 띄게됐고 높은 순위로 WKBL무대를 밟을 수 있었습니다. 어찌보면 저는 정말 특이 케이스에요. 농구는 정말 꾸준하게 잘했던 선수들이 계속 잘하는 경우가 태반이거든요. 고1때까지만해도 대학에 가야되지 않을까라는 고민을 많이 했었는데 저로서도 믿기지않는 결과가 나왔던거죠.



 



​​​​Q.프로 생활 초창기에 출장 기회가 적었는데, 이미 학창 시절에 비슷한 경험을 해서 더 잘 견디어냈지 않나 싶어요.
아…, 솔직히 그런 생각은 안해봤는데 말씀을 듣고보니 그런 영향도 있을 수 있었겠구나 싶네요. 처음에 프로에 들어갔는데 언니들이 너무 잘하는거에요. 본래도 잘하는 선수들인줄 알았지만 옆에서 직접보니 또 다르더라고요. 그래서 ‘아, 나는 이런 이런 부분이 부족하니까 어느정도 채우고 뛰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구나’하고 마음을 어느 정도 내려놓았던 기억이 나요. 그래서였는지 경기에 많이 못나가는게 괴롭고 그러지는 않았어요. 다만 경기 체력이나 기술적인 요소를 만들어가는 부분이 힘들었던 것 같아요.

​​​​Q.조급해하기보다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려한 모습이 인상적이네요.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아마 때도 많이 잘하던 선수는 아니었지만 프로에 가니까 장난이 아니더라고요. 기본적인 신체부터 저와는 다른 선수가 많더라고요. 근육의 질부터 거기서 나오는 폭발적인 파워나 탄력, 그리고 정말 빠르고 기술 좋은 선수까지…, 아무리봐도 당장 제가 추월한 요소가 잘 안보이는거에요. 쓸데없이 자기 합리화를 할게 아니라 현실을 받아들인거죠. 어차피 타고난 육체 능력은 한계가 있어요. 어떤 부분에서 경쟁할 수 있을까부터 이런저런 것을 많이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더라고요.

​​​​Q.적어도 멘탈적으로는 준비가 잘 되어있었던 듯 싶어요.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거든요.
그러지도 않아요. 제가 잘 잊어버리는 성격인지라 담담하게 얘기하고있지만 당시에는 고민도 많고 힘들었을거에요. 멘탈이 좋았다기보다는 그런 과정을 반복해서 겪으면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성장하지 않았나 싶어요. 다들 그러잖아요. 과거의 힘든 일도 지나고나서 떠올려보면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고요.

​​​​Q.신한은행이 통합 5연패하면서 왕조를 만들어가던 시절이 본인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을까요?
글쎄요…, 제가 당시에 식스맨으로 그럭저럭 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워낙 쟁쟁한 멤버들인지라 거기에 대고 전성기를 논하기가 쑥스럽네요. 사실 왕조 초중반까지는 그저 그랬고요. 후반기 마지막 우승할 때 정도가 기량적으로 많이 올라왔던 시기가 아닐까 싶어요. 중요한 순간에 종종 투입되기도 했고 출장 시간도 어느 정도 가져갔으니까요. 전성기라는 표현보다는 선수로서의 성장 과정을 꾸준히 가져가던 시절이라고 보는게 맞을 듯 싶어요. 정말 많은 것을 배운 때이기는 해요. 구태여 코트에서 많이 뛰지못해도 쟁쟁한 언니들과 함께 훈련하고 거기서 실력이 늘어가고 그러한 모습들이 그래도 제 예상보다 더 롱런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지않았나 싶습니다.

​​​​Q.식스맨들은 출장 시간이 들쭉날쭉 하잖아요. 슛감 유지하고 그런 부분에서 어렵지 않았나요?
처음에는 그랬을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지나고 경험이 쌓여가니까 익숙해지더라고요. 벤치에서 경기를 보다보면 ‘이쯤에서 내가 들어갈 것 같은데’라는 것이 어느 정도 느껴져요. 게임의 흐름을 읽는 눈이 생긴다고나 할까요. 그러면 혼자 제자리에서 가볍게 뛰면서 슛을 쏘는 동작을 취해보기도 하면서 준비를 하는거죠. 그리고 저는 오히려 식스맨 쪽이 더 잘맞았던 것 같아요. 체력이 약하다보니 계속 뛰는 것보다는 필요한 타이밍에 들어가서 치고 빠지는?(웃음) 몸도 빨리 풀렸고 슛감도 금세 찾아가기도 했죠. 나중에는 주전 생활도 했지만 은퇴하고 당시를 돌아보니까 저라는 선수가 어떤 자리에서 가장 효율성을 발휘하는지 알겠더라고요.

​​​​Q.2013년도 대만에서 있었던 윌리엄존스컵 농구대회에서 주포로 활약했어요. 특히 미국전에서는 3점슛 9개를 포함해 28점을 쏟아부으며 승리를 이끌기도 했고요.
제 스스로 느끼기에 기량도 많이 올라오고 게임을 보는 시야도 넓어지고 그랬던 시기같아요. 딱 좋을 때 대표팀에 뽑힐 수 있었고 비록 프로 선발은 아니었지만 미국전 승리도 가져가고 그래서 기분 좋았습니다. 당시 대표팀이 1.5군정도였어요. 그러다보니 제가 할 일이 더 많아졌고 이전과 달리 선배 입장에서 뛰는 것인지라 책임감도 느껴지고 그랬던 기억이 납니다.



 



“저만 짝사랑한다고 느꼈는데 그도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됐습니다”

​​​​Q. 2015~16 시즌 초반 훈련도중 아킬레스건이 파열되는 부상을 입었어요. 그 정도의 큰 부상은 처음이었다고 들었는데 정신적으로도 많이 힘들었을 듯 싶어요.

이전 10여년 동안 큰 부상이 없었다가 그때 딱 제대로 다치고 말았죠. 그때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프로에서의 큰 부상을 겪게 됐는데 어떤 면에서는 전화위복이 된 부분도 있어요. 제가 본래 아킬레스건이 좋지못했거든요. 끊어진 그쪽이 7년 정도 아킬레스건 염증을 달고살았던 부위거든요. 그래서 안좋을데로 안좋아진 상태였죠. 아이러니하게도 다친 덕분에 아킬레스건을 정확히 진단하고 거기에 맞는 처방을 가져갈 수 있었다고 보는게 맞습니다.

​​​​Q.아킬레스건같은 경우 치료를 잘해도 운동 능력에 영향을 준다고 들었어요.
맞아요. 그런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고요. 비슷한 예로 남자농구 강병현 선수같은 경우 저와 같은 해에 아킬레스건 수술을 받은 것을 기억하거든요. 한창때 운동능력이 무척 좋았던 선수로 기억해요. 하지만 수술 후에는 전성기만큼 활약하지 못한 것 같더라고요. 저같은 경우는 그런 영향을 덜받았어요. 본래 운동능력으로 플레이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던 이유카 컸죠. 외려 고질적인 아킬레스건 통증이 사라지고 뛸 때 꽉 잡아주는 느낌까지 들며 몸을 쓰는데는 예전보다 한결 더 나았던기억이 납니다.

​​​​Q.그렇다면 진작에 수술을 받을걸 하는 생각도 들었겠어요?
그것은 아니에요. 아킬레스건을 수술하고 재활까지 하는데는 최소 6개월이 걸리거든요. 쉽지않은 기간과 과정을 경험해야 하죠. 한번이니까 했지 두 번은 못하겠다는 생각까지 들더라고요. 이전에 부상을 당했던 선수들의 마음을 공감할 수 있는 계기도 됐습니다. 본의아니게 수술과 재활을 반복하던 선수들도 있는데 정말 어떻게 견디었을까 싶어요. 사실 그 이전에 아킬레스건 염증 때문에 힘들었을 때 트레이너 선생님들에게 수술에 대한 얘기를 꺼내기도 했어요. 거기에 대해 당시 선생님들께서는 수술은 최대한 미룰 수 있으면 미루는게 좋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예민한 부위에 칼을 대는만큼 완벽하게 낫는다는 보장도 없고 거기에 쏟는 시간과 고생도 장난이 아니니까요. 부작용도 위험부담도 돌아볼 필요가 있죠. 한번 수술을 받고 경험해보니까 확실히 알겠더라고요.

​​​​Q.2017~18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하며 선수 생활을 마감했습니다.
당시 제 나이가 33살인가 그랬을거에요. 기량이 남아있던 시절인지라 주변에서도 왜 그렇게 빨리 은퇴하냐고 말리는 분들도 적지않으셨어요. 하지만 프로 초창기 힘들었던 시절 이왕 프로 생활을 시작했으니 10년은 해보자고 마음 속으로 다짐한게 있는데 나름대로 목표도 달성했고 좋은 동료들과 함께 우승의 순간도 여러번 경험했으니 큰 미련은 남지않더라고요. 때마침 그해 FA였는데 제 나름의 기준을 정해놓고 더 할 수 있으면 하고 아니면 마무리짓자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개인적으로 많이 지쳐있기도 했고요. 때마침 팀도 세대교체를 생각하고 있던 시기였던지라 제 의지로 물러나기 좋은 때라는 판단이 섰습니다. 때문에 팀과 잘 얘기를 나눴고 서로 감정상하지 않고 기분좋게 이별할 수 있었어요. 버티는데까지 버티다가 어쩔 수 없이 물러나는 모양새가 아닌 스스로 적당한 때에 은퇴하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그렇게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싶었어요. 더불어 신한 한팀에서만 뛰고 은퇴한 것도 너무 좋았고요.

​​​​Q.마지막으로 김연주에게 농구란 무엇일까요?
선수시절 내내 짝사랑같은 존재라고 생각했어요. 더 가까워지고 싶었는데 마음만큼 다가가기 쉽지않았던…, 하지만 은퇴하고 돌아보니까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던 부분도 있었던 듯 싶어요. 저는 짝사랑이라고만 여겼지만 농구에게서 받은 사랑도 무척 크더라고요. 그때는 좀 더 잘하고싶은 욕심에 몰랐었는데 사랑도 어느 정도 이루지않았나 싶고요. 저만 농구를 바라보고있었다고 생각했지만, 모르는 사이 농구도 저를 쳐다보고 있었고 많은 것을 줬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정말 감사한 일이죠. 농구야 고마워.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본인제공, WKBL제공

기사제공 점프볼

김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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