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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농구 ‘전설’ 박찬숙, 지도자로 코트 복귀 [이종세 칼럼]

조아라유 0
84 LA 올림픽 은메달…아시아 선수권 4연패 주역
서대문구청 여자실업 농구단 초대 사령탑 맡아
“화끈하고 시원한 공격 농구로 팬에게 보답할터”



한국여자농구의 ‘전설’ 박찬숙(64)이 지난주 코트에 복귀했다. 선수가 아닌 지도자로서 서울 서대문구(구청장 이성헌) 여자농구단 초대 사령탑에 선임된 것이다.

박찬숙의 코트 복귀 기사를 접하면서 필자에겐 39년 전 미수교국 ‘중공’ 땅에 처음으로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서 태극기가 게양됐던 감격과 환희의 순간이 자연스레 소환됐다.



여자농구 국가대표 시절 박찬숙(15번). 사진=중국농구협회

 

 

 

1984년 10월 24일 오후 상해(上海)체육관. 신축 개관한 이 체육관에서 제10회 아시아 여자농구선수권대회 우승을 노렸던 중국팀에게 62대61의 역전극을 연출하며 대회 4연패의 위업을 이룬 한국 여자농구팀. 이 쾌거 한가운데에는 등 번호 15번을 단 주장 박찬숙이 있었다.

당시 동아일보 체육부 기자로서 현장에서 이 순간을 지켜봤던 필자의 뇌리엔 아직도 그 감동의 장면이 생생히 남아있다. 1984년 8월 LA 올림픽에서 중국을 꺾고 한국 구기 사상 처음 올림픽 은메달을 땄던 박찬숙은 “뛸 곳이 마땅찮은 선수들을 모아 화끈하고 시원한 공격 농구로 팬들의 기대에 보답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한국 기자로는 ‘죽(竹)의 장막’ 중국 첫 취재

그때만 해도 한국과 중국은 적대국으로 국교가 없어 서로 인적 교류가 불가능했던 시절. 이 대회가 중국에서 열리기까지는 아시아 농구연맹 이병희(1997년 71세로 작고·7선 국회의원) 회장의 역할이 컸다.

육사 8기로 김종필 전 총리와 동기였던 이회장은 1982년 제9회 아시아 여자농구선수권대회 기간 중 중국(당시는 중공으로 불렸음)이 차기 대회 유치 의사를 밝히자 “국교가 없는 한국의 선수단과 기자들의 입국을 보장하라”고 요구했고 중국이 이를 받아들여 성사됐기 때문이다. 이는 이 회장이 대회 기간 중 상해 현지에서 필자에게 한 말이다.

당시 국내 언론계는 국교가 없는 중국에 기자를 파견할 좋은 기회여서 신문, 방송, 통신 등 15개 중앙언론사가 모두 취재에 참여했다. 덕분에 한국의 신문기자로서는 처음으로 ‘죽(竹)의 장막’중국을 취재할 수 있었다. 행운이었다.
 

박찬숙, 독감 후유증 불구 역전 우승 역할

이 대회 참가국은 한국, 중국, 일본을 비롯해 필리핀, 인도, 말레이시아, 마카오, 싱가포르 등 8개국이었으며 최대의 관심거리는 대회 4연패를 겨냥한 한국과 홈코트에서 우승을 노리는 중국의 대결이었다.

조승연, 신현수 코칭스태프가 이끄는 한국은 1m 90의 센터 박찬숙을 비롯하여 2m 2의 장신 김영희(1월 31일 지병으로 60세에 사망)에 김화순, 성정아, 이형숙, 최애영, 최경희 등 12명이 포진했다.

2개월 전 LA 올림픽에서 한국에 56대69로 밀려 결승 진출이 좌절됐던 중국은 ‘아시아의 마녀’로 불렸던 천위에팡(陳月芳·2m16), ‘괴물’ 정하이샤(鄭海霞·2m4) 등을 앞세워 설욕을 벼르고 있는 상황.

중국 측은 대회 참가를 위해 상해 홍차오(虹橋) 공항에 도착한 한국선수단에 맨 먼저 “15번(박찬숙)이 왔느냐”고 물어볼 정도로 박찬숙에게 신경을 곤두세웠다.

10월 13일 대회가 개막하자 한국은 마카오(151-35) 싱가포르(116-30) 필리핀(105-35) 인도(159-47) 말레이시아(106-32) 일본(91-50) 등은 차례로 가볍게 눌렀으나 중국에게는 결선 1차전에서 59대 76으로 크게 졌다.

마침내 대회 마지막 날 한국과 중국의 최종결승. 체육관을 꽉 메운 2만여 중국 관중의 일방적 응원 속에 전반을 29대34로 뒤진 한국은 후반 종료 3분 17초를 남기고 점수차가 54대 61까지 벌어져 패색이 짙었다.

하지만 경기 종료 6초 전 60대61로 뒤진 상황에서 최애영의 결승골이 작렬, 1점 차의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었다. 이 과정에서 독감 후유증에도 불구, 코트에 나선 박찬숙이 후배들을 독려하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날 결승경기 도중 2층 관중석에서 “한국 파이팅” “박찬숙 파이팅”이라는 익숙한 외침이 들려 필자가 뛰어 올라가 본 결과 10여 명의 한국 외항선원이 전날 상해항에 정박했다가 응원차 체육관을 찾아 목이 터지라고 한국팀을 응원한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상해 거리 출근 시간 ‘자전거 물결’ 장관

40년이 다 된 오래전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사회주의 체제인 중국의 이미지는 무언가 억압적이고 어두운 느낌이다. 10월 10일로 기억되는데 홍콩에서 중국민항으로 갈아타고 홍차오 공항에 도착하니 밤 10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입국 절차도 몹시 까다로웠다. 숙소인 금강대하(錦江大廈)에 도착하니 새벽 2시가 넘었다. 1930년대 프랑스인들이 지었다는 이 호텔은 고풍스러운 건물로 1972년 미국의 닉슨 대통령과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총리가 상해 커뮤니케를 발표, 미중수교의 물꼬를 튼 곳이다.

다음 날 아침 호텔 식당. 한국선수단을 위한 김치가 있었지만, 고춧가루나 젓갈을 쓰지 않고 소금에만 절인 배추를 내놓았다. 먹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1984년 중국 상하이 중심거리 중 하나인 화이하이루 모습

 

 

 

중국 방문 첫날 가장 궁금한 것은 상해의 거리 풍경이었다. 조식은 죽으로 적당히 때우고 거리로 나섰는데 누군가 2명이 필자를 미행하는 느낌을 받았다.

중국의 사복 경찰로 보였지만 오히려 신변 보호가 될 것 같아 든든했다. 마침 출근 시간이어서인지 거리는 ‘자전거 물결’이었다. 허름한 옷차림의 시민들이 버스나 전차 대신 자전거를 타고 직장에 나가는 것 같았다.

거리 곳곳에 ‘경축 아시아여자농구선수권대회’라는 홍보물이 보였다. 개최 기간과 장소 외에 참가국 이름을 써 놓았는데 ‘韓國’이라고 하지 않고 ‘南朝鮮’으로 표기하고 있었다.

필자는 당시 요통이 있어 같은 증상을 보인 최경희 선수와 함께 호텔 내에 있는 의무실에서 침술 치료를 받기도 했는데 이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면서 ‘한국 기자가 중국 침술로 치료받았다’는 내용이 외신에 보도됐다고 당시 동아일보 홍콩특파원이 필자에게 텔렉스로 알려왔다.

중국당국에 의해 현지에서의 취재와 송고가 통제받았지만 전두환 군부 정권의 한국도 중국에서의 취재와 송고에 제동을 걸어 중국 관련 모든 기사는 사전 검열을 통과해야만 게재할 수 있었었다. 돌이켜보면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옛이야기다.

이종세(용인대 객원교수·전 동아일보 체육부장)
 

기사제공 MK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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