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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산 득점 1위… 20대 은퇴후 평범한 주부로 살고있죠”

조아라유 0

[김종수의 농구人터뷰(60)] '마녀' 최경희

 



슛이 매우 빼어난 슈터가 있다. 단순히 받아먹는 플레이만 능한 것이 아닌 터프샷이나 압박 수비를 벗겨내는데도 일가견이 있다. 속공 상황에서 혼자 공을 몰고 들어와 그대로 3점슛을 꽂아넣는가하면 집요하게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수비수를 요리조리 피해가면서 슛을 쏜다. 공간이 보인다싶으면 3점 라인에서 꽤 떨어진 거기에서도 과감하게 성공시키기도 한다.

슛 타이밍이 보통의 다른 슈터들보다 반박자는 빠르며 한번 들어가기 시작하면 신들린 듯 연달아 폭발해버린다. 강한 체력과 엄청난 스피드를 바탕으로 경기내내 쉬지않는 미친 활동량까지 기본 옵션으로 장착되어 있는지라 상대 수비수의 멘탈을 탈탈 털어버리기 일쑤다.

이런 활약을 꾸준히 이어갈 수 있는 슈터가 있으면 어떻겠는가? 그야말로 무슨 희생을 치러서라도 꼭 자신의 팀으로 데려오고 싶을 것이다. 저정도 수준의 슈터는 상대팀 수비 방향에도 영향을 줄수 있는지라 단순한 외곽 에이스를 넘어 그 자체가 하나의 전술이 될 정도로 엄청난 위력이 가능해진다.

해당 슈터는 거기에 더해 미드레인지 점퍼와 돌파까지 능숙하다. 단순히 갖춘 정도가 아니다. 3점슛 이상으로 높은 성공률을 자랑한다. 상대가 자신의 외곽슛에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을 때 빈틈을 이용해 연거푸 돌파로 수비진을 흔들고 수시로 중간지점에서 미들슛을 쏘아댄다. 승부욕은 강하지만 성격까지 차분해 어지간히 대놓고 신경을 긁어대도 좀처럼 기복을 보이지않는다.

하지만 여기서 다가 아니다. 다소 투박해보이는 드리블이지만 좀처럼 공을 뺏기지않고 타이밍을 조절해가며 내외곽을 오간다. 거기에 타고난 센스까지 좋다. 자신의 플레이뿐 아니라 전체동료를 함께 봐주는 넓은 시야가 장착되어 있는데 그로인해 양질의 어시스트를 수시로 뿌려준다.

보통 전천후 슈터의 어시스트는 자신에게 수비가 집중되었을 때 빈틈을 봐서 빼주는 정도가 보통이다. 해당 슈터는 거기서 한발 더 들어간다. 킥 아웃 패스 등은 기본이고 엔트리 패스 역시 쉽게쉽게 잘 넣어준다. 어깨 힘이 좋아 상대 코트로 내달리는 동료에게 길고 정확한 아웃렛 패스를 마치 택배 배달하듯 건네기도 한다. 상황에 따라서는 1번 포지션도 가능한데 심지어 국가대표팀에서도 포인트가드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해 냈다.

어찌보면 ‘3점슈터가 그렇게 다 한다는게 가능해?’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그런 슈터가 여자농구계에 존재했다. 농구대잔치 시절 ‘3점슛의 마녀’, ‘작은 탱크’, ‘탱크 가드’ 등으로 불렸던 최경희(56‧166cm)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1984년 은광여고를 졸업하고 동방생명(현 삼성생명)에 입단했는데 농구대잔치 6번의 우승(1986, 1987, 1988, 1990, 1991, 1992)에 기여했으며 득점왕 4번, MVP에 3번이나 선정됐다.

가장 대단한 점 중 하나는 큰 부상없이 꾸준하게 코트에 선 가운데 매경기 기복없이 제몫을 해냈다는 점이다. 그결과 농구대잔치 여자부 최다 경기 출장(209경기), 최다 득점(3,939점), 최다 3점슛(5,033개), 최다 자유투(594개) 등의 굵직한 기록을 남겼다. 어시스트(550개), 스틸(287개) 또한 1위와 차이가 크지않다.

리바운드, 블록슛 등 빅맨의 영역을 제외하고는 전부분에서 상위권에 올라있는데 여자농구 역사를 통틀어도 이정도로 다재다능하면서 빼어난 슈터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다. 1984년 LA올림픽 은메달, 1988년 아시아선수권 대회 우승 및 MVP,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금메달 등 국제대회에서도 황금기의 주역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현역 시절 최경희의 경기를 본 팬들은 하나같이 ‘최경희의 진가는 기록이 아닌 임팩트다. 소속팀이든 대표팀이든 어렵고 중요한 순간에는 늘 최경희가 있었다’고 입을 모아 회상한다. 우리팀에서야 슈퍼히어로가 따로 없을 정도로 든든했겠으나 상대팀 입장에서는 ‘마녀’로 보일 수도 있었던 인물이었다.


 

 



“어쩌다보니 아이스하키 패밀리가 되어버렸습니다”

Q.요새 어떻게 지내십니까?

안녕하세요. 저만큼 근황이 단순한 사람도 없을겁니다. 선수로 은퇴하고 3남 1녀의 엄마로 계속 살아왔죠. 근황을 잘 모르시는 분들은 자녀들이 운동을 했냐에 대해서도 궁금해하시더라고요. 아들셋은 모두 운동을 했어요. 이총재, 이총현, 이총민인데 모두 연세대학교를 나와서 아이스하키 선수의 길로 갔습니다.

Q.아들 셋이면 정말 장난이 아니었을 듯 싶어요. 운동하고 육아하고 어떤 것이 더 힘드셨을까요?
운동했던 선후배들에게 다 물어봐도 대답은 비슷할 듯 싶어요. 운동과 육아중 선택하라면 단연 육아가 힘듭니다. 운동이 아무리 힘들다고해도 그것은 나 자신과의 싸움일 뿐인데 육아는 보살피고 돌봐야하잖아요. 훨씬 섬세한 손길이 필요하고 마인드 컨트롤도 요구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상대 비교일뿐이고요. 저는 그렇게까지 힘들었다고 생각안해요. 주변에서는 ‘아들 셋을 어떻게 키웠어? 정말 대단해’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세요. 저희 아들들이 착해서 그런지 저는 주변에서 대단하다고까지 말하는게 더 이해가 안되요. 딸도 너무 착해서 엄마를 많이 도와줬고요.

Q.독박 육아를 하셨나요?
신랑이 전혀 안 도와준 것은 아니지만 사실상 독박 육아에 가까웠죠. 하지만 이것은 저만 특별할 것은 없어요. 당시 엄마들은 다 그랬어요. 지금이야 육아분담이다 뭐다 그렇지만, 저희때야 그게 당연한줄 알고 아이들을 키우던 시절이었죠. 집에서 뭐하겠어요. 엄마로서 아내로서 주부로서 할 일은 정해져있잖아요. 저만 특별한 상황에 놓여있었다면 이래저래 불만도 많았을지 모르지만 남들 다하는 것인데 저라고 왜 못하겠어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요. 무엇보다 장성한 자녀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뿌듯해요. 이런 행복이 어디있겠어요.

Q.그나저나 엄마가 농구인인데 어쩌다 아이스하키를 시키셨어요? 엄마 입장에서도 생소한 종목이었을 듯 싶은데요.
하하핫…, 그게 어쩔 수 없었어요. 딱히 아이스하키를 시키고 싶어서 시킨 것은 아니에요. 취미로 하게됐는데 아이들이 너무 깊숙이 빠져들어서 선수의 길까지 가게됐네요. 총현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였나? 그때 스케이트를 타는 특별활동 시간이 있었어요. 그런데 전학 온 친구가 총재나 총현이보다 스케이트를 잘 탓다는 거에요. 그럴 수밖에 없는게 아이스하키를 했었나봐요. 그 얘기를 듣고 총재가 아이스하키를 하고 싶다고 말해서 총현이랑 같이 시작하게 됐어요. 승부욕이 강한게 저를 닮은 것 같기도하고…(웃음)



 



Q.다들 엄마를 닮아서 운동신경과 센스가 장난이 아니었다고 들었어요. 한명 쯤은 농구를 했어도 좋았을텐데 조금 아깝네요.
그러게요. 그렇게 몰입할줄 알았다면 농구도 권할걸 그랬나봐요.(웃음) 어린 나이지만 정말이지 엄마인 저도 놀랄 정도로 열심히 하더라고요. 좋아서 하는 것이니까 그랬겠죠. 사실 아이들의 운동신경, 센스 등이 온전히 저를 닮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어찌 아이들이 한쪽만 닮겠어요. 다만 신랑이 운동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으니까, 주변에서 저를 더 닮은 듯 싶다고 말하더라요. 모르죠. 신랑 유전자 중에 운동 쪽에 강점이 있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니까요. 셋 다 키가 아주 큰 것은 아니지만 농구를 했다면 가드로 뛸만큼은 되요. 만약 총현이가 초등학교때 승부욕을 자극했던 전학생이 농구를 했다면 농구 3형제가 됐으려나요?(웃음)

Q.어쨌든 아들 셋 모두 아이스하키 쪽으로 잘 풀린 것 같아요.
맞아요. 다들 국가대표도 해봤고 나름 잘 풀렸어요. 첫째 총재는 은퇴를 한 상태고요. 커리어는 현재 대명 킬러웨일즈에서 뛰고있는 둘째 총현이가 꽤나 화려해요. 2015년 최연소(당시 기준) 국가대표에 발탁되어서 삿포로 동계아시안게임에서 은메달도 땄고 아이스하키 선진국인 핀란드, 러시아, 미국, 캐나다 리그를 모두 경험했죠. 형들을 따라 아이스하키 세계에 입문했던 막내 총민이는 현재 스웨덴 리그에서 뛰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한 것에 비해서 언론의 주목도 덜받고 한 것은 아쉽지만 그런 부분은 어쩔 수 없죠. 일각에서는 아이스하키를 귀족 스포츠라고 부르면서 취미로는 많이들 하고 있어요. 다만 한국에서는 인기 스포츠가 아닌지라 선수 생활을 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아요. 대학 때까지 잘하다가 이후에 갈길이 적어서 해외리그라도 진출하지않는 이상 자칫 경력이 단절되어 버릴 수도 있거든요. 그렇다고 아이스하키를 시킨 것을 후회하지는 않아요. 다들 본인들이 좋아서했고 더 큰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니까요.


 

 



“그때는 20대 은퇴가 당연했습니다”

Q.은퇴를 20대에 했어요. 너무 열정적으로 선수 생활을 하셔서 몸에 무리가 왔을까요?

전혀요. 저같이 건강하게 은퇴한 선수도 드물겁니다. 조금씩 잔부상은 있었지만 수술을 받는다던가 그런 적은 단 한번도 없었으니까요. 은퇴할 무렵에도 신체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힘도 남아돌았어요. 그렇다면 왜 은퇴를 그렇게 빨리했냐고 물으실 것같은데 답변을 하자면 저는 절대 빨리 은퇴한 것이 아니에요. 20대 후반 쯤에 했는데 다른 선수들에 비하면 그래도 2~3년은 더했다고 보면 되요. 인터뷰 내내 가장 많이하게 될 말인지도 모르겠는데요. 그때는 그랬어요. 26살이 되기 전에 은퇴하는 선수들이 수두룩했으니까요. 특별한 의미는 없어요. 그 정도면 많이 했으니까 후배들을 위해서 길을 트라는 것이죠.

Q.남자 선수들보다 데뷔가 빠른 것을 감안해도 너무 선수생활이 짧지 않나 싶어요. 못해서 은퇴하는게 아니라 그냥 은퇴할 나이가 왔으니 접으라는 것이잖아요.
맞아요. 부상 등으로 인해 일찍 기량 하락이 와서 은퇴하는 선수도 있었겠지만 몸이 멀쩡하고 기량이 여전하다해도 특별히 오래 버티기는 쉽지않았어요. 농구를 더 하고싶다고 버티다가는 후배들 생각안하고 자신만 아는 이기적인 선수가 되기 십상이었고 무엇보다 팀에서 그걸 받아주지도 않아요. 그냥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시기가 왔으면 물러나야 하는 것이었죠. 불만 그런 것도 딱히 없었어요. 당연히 그래야되는 분위기였으니까요.

Q.에이스급 선수가 나이가 차서 그것도 20대에 은퇴할 수밖에 없었다는게 이해가 되지않네요. 잘하는 선수가 여럿 있으면 팀 전력은 더욱 강해지는 것 아닌가요?
저희 선수들이 이해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었어요. 선배들부터 그래왔고 저희 뿐 아니라 후배들에게도 이어질 문화같은 것이었으니까요. 지금 프로 농구를 보시는 분들은 어리둥절하실수도 있을 듯 싶어요. 지금이야 어느 정도 준수한 식스맨급만 되어도 30살은 가볍게 넘기잖아요. 중반까지 뛰는 선수들도 꽤 있고요. 결혼후 출산하고도 선수로 복귀하는게 가능해졌잖아요. 워낙 시스템적으로 체계적인 몸관리가 잘 되고 있으니까요. 저희 때는 실력의 유무를 떠나 나이가 차면 ‘이제 시집가야지?’라는 말을 수시로 들어야만 했어요. 솔직히 저도 프로였다면 팀에서 나가라고 등 떠밀기 전까지는 악착같이 붙어서 선수 생활을 했을 것 같기도 해요. 아니 어쩌면 그 와중에도 버티기 모드를 시전하거나 다른 팀으로 가서 커리어를 연장했을지도 모르죠.


 

 



Q.아마와 프로의 차이가 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가봐요?
많이 크죠. 일단 받는 돈에서 상대가 안되잖아요. 금액의 크고 작음도 그렇지만 프로에서 잘하면 그만한 댓가가 충분히 따라오니까 동기부여도 됐을 것 같아요. 실업 시절에는 당연히 프로보다 적게 받았지만 농구를 막 더 잘한다고 다른 선수들보다 특별히 더 받지도 않았어요. 직장인 개념이었으니까 지금처럼 한만큼 연봉협상을 해서 대박을 노린다? 그런 것은 상상도 못했죠. 보너스 등에서 차등지급은 살짝 있었지만 팀내 간판급 스타나 식스맨이나 받는 월급 등은 거기서 거기였어요. 아마 그랬으니까 다들 어느 정도 나이가 차면 알아서들 은퇴한 듯 싶어요. 노장 때까지 죽어라 뛰면 뭐해요. 어차피 호봉제니까 받는 돈은 똑같고 몸만 축나는데요. 은퇴 후 취직은 보장해주는 시스템이었던지라 차라리 일찍 직장에 투입되어 거기서 경력쌓는게 나았죠.

Q.그런 상황에서도 다들 열심히 뛴게 대단해요.
열심히 뛰는 것으로만 하면 옛날 선수들이 대단했죠. 지금처럼 체계적으로 훈련하는 시절이 아닌지라 스파르타식으로 몰아붙이는 훈련 다 소화하고 개인 훈련하는 선수도 많았으니까요. 그냥 다들 무조건 열심히들 했어요. 아프면 테이핑하고 대포주사맞고 뛰는 경우도 허다했으니까요. 국가대표팀에 임하는 자세도 달랐어요. 가슴에 태극마크를 단다는 것이 너무도 큰 영광이었던지라 국제대회 나가면 더욱 더 죽을 힘을 다해서 임했습니다. 지금이야 뭐, 그정도로 태극마크에 간절하지는 않잖아요. 자칫 부상이라도 당하면 연봉에도 지장이 있어서 몸을 사리게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어요. 한데 특별히 무엇인가가 잘못됐다고 하기에는 어려워요. 그냥 당시의 문화나 시스템이 그랬을 뿐이니까요. 그때는 그게 맞았고 당연했어요.

Q.여자 농구인기가 예전같지 않다는 얘기가 많아요.
당시 여자농구 인기는 남자부 못지않았어요. 배구보다도 인기가 훨씬 많았어요. 지금보다 팀도 많았고 자의든 타의든 계속해서 세대교체가 됐던지라 스타도 계속해서 배출되었던 것 같아요. 국제대회 성적이 좋았던 것도 이유가 될 수 있겠고요. 선순환이라고 할까요? 스타가 많이 나오니까 언론에서도 홍보를 많이 해줬어요. 특히 동포지션 선수들끼리 묶어서 라이벌 관계도 만들어줬거든요. 국민은행하고 저희하고 경합을 많이했던 시기인지라 성정아-조문주의 센터라이벌 저나 신기화 선수의 슈터 라이벌 등 관심을 끌만한 요소를 계속 생산해내면서 팬들을 잡아끌었어요. 특히 슈터같은 경우 제가 선수로 뛴 시기만 언급해도 박정숙 언니부터 신기화 선수, (이)강희 등 꾸준하게 잘 이어졌던 것 같아요.


 

 



“슈터로서의 비결요? 좋은 동료들을 만난 덕이 컸죠”

Q.역대급 슈터를 논할 때 빠지지않고 언급되요. 슈터도 여러 가지 스타일이 있는데 어떤 유형이었나요?

아무래도 제가 신장에서 약점이 있다보니 많이 뛰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많은 활동량에 슛 타이밍도 빠르게 가져가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려면 체력이 필요했고 훈련도 열심히 했죠. 사실 선천적으로 감각을 타고난 슈터들도 있다고는 하는데 저는 노력형이지 않았나싶어요. 많이 뛰다보면 얻는 것도 꽤 있어요. 슛 찬스가 자주 생기는 것은 당연하고요. 어시스트를 할 수 있는 기회도 생겨나요. 덕분에 어시스트 1위를 한적도 있어요. 3점슛 외에 다른 무기의 필요성도 느껴서 꼭 외곽만 고집하지않고 미들라인에서도 적극적으로 슛을 던지고 돌파도 과감하게 했던 기억이 나요. 일단 옵션이 많으면 상대 수비가 어려워지니까 결과적으로 3점슛 찬스도 자연스레 만들어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나름 마인드 컨트롤도 계속했어요. 슈터는 자신감이 죽으면 망하는 거에요. 몇 개 안들어갔다고 주눅이 들면 안되니까 슛감이 안좋은날도 평소와 같은 리듬으로 쏘려고 했고 이른바 잡생각이라고 하죠. 그런 것이 자꾸 생기면 방해가 되니까 단순하게 플레이하려고 스스로를 자꾸 다 잡았습니다.

Q.어깨나 손목 힘이 상당히 좋았다고 들었어요. 코트 끝에서 끝까지 정확하게 아웃렛 패스가 들어갔다고 하더라고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런식으로 아웃렛 패스 뿌리는 여자 선수들도 적지 않았어요. 속공상황에서 아웃렛 패스로 득점을 성공시키면 기분이 매우 좋았습니다. 하지만 딱히 저만 특별한 요소는 아니었어요. 어쨌거나 어디가서 힘으로는 쉽게 밀리지 않았어요. 키가 작은 상태에서 힘까지 안되면 쓸데가 없잖아요.(웃음) 일단 슈터는 손목 힘이 좋아야되요. 그래야 정확한 슛줄기가 나가고, 지쳤을 때도 3점슛 거리를 유지할 수 있거든요. 저는 키가 작으니까 무조건 슛을 빨리 쏘려고 했어요. 1분에 몇 개 쏘기 등 적어도 빨리 쏘는 부분에 있어서 만큼은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렇게 빨리 쏘다 보면 정확성이 떨어질 수도 있거든요. 다행히 그런 스타일이 완전히 익숙해지자 빨리 쏘면서도 성공률을 유지하는게 가능해지더라고요. 수비수 입장에서도 곤란하게 되는거죠. 빨리 쏘는데 성공률도 좋으니 마음이 급해지지 않겠어요. 저는 그것을 역으로 이용해서 다른 플레이를 만들어내고요.

Q.슈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나와 잘맞는 좋은 동료같아요. 적재적소에서 제 타이밍에 공을 주고 받을 수 있는 동료가 있으면 안정적으로 슛을 쏠 수 있죠. 기본적으로 슈터라고 불리는 선수들은 슛 터치나 손끝 감각에 있어서는 다들 거기서 거기에요. 문제는 경기중 자신만이 좋아하는 타이밍에서 슛을 쏠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있느냐는 겁니다. 어차피 상대 수비 입장에서는 슈터가 최대한 어렵게 슛을 쏘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연습할 때와 달리 편하게 슛을 던질 기회는 별로 없다고 보면 맞습니다. 앞서 언급한데로 미친 듯이 뛰어다니거나 아님 자신만의 슛폼을 만들어서 수비수의 타이밍을 빼앗아야죠. 내가 선호하는 타이밍에서 얼마나 슛을 던질 수 있느냐가 키포인트 일 듯 싶어요. 그러려면 동료의 도움은 필수입니다. 딱 좋은 순간에 스크린을 걸어준다던가, 발을 맞췄을 때 공이 척하고 들어오면 내가 원하는 타이밍에서 슛을 쏠 수 있으니까 그만큼 성공 확률이 높겠죠.


 

 






Q.그렇다면 선수 생활하면서 가장 잘맞았던 동료로는 누가 있을까요?
두말할 것 없이 (성)정아죠. 정말 영리하게 농구를 잘하는 선수였어요. 빅맨이면서도 가드급 센스를 가졌다고 할까요? 슈터와 빅맨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잖아요. 빅맨이 리바운드를 잘 잡줘야 슈터는 좀 더 마음 편하게 슛을 쏠 수 있어요. 반대로 슈터가 외곽에서 빵빵 때려주면 빅맨 또한 수비의 압박을 덜 받는지라 활동 공간이 넓어지게 되요. 시너지 효과가 참 잘 발휘되는 관계가 아닐까 싶어요. 정아는 정말 슛쏘기 편하게 패스를 잘 줬어요. 본래도 외곽으로 패스를 잘 주는 선수이기도 하거니와 오랫동안 호흡을 맞추다보니 보지않아도 이 정도 움직이면 이쪽으로 올 것 같다고 알 수 있게 되더라고요. 아니라다를까 예측한데로 패스가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던지라 정아한테 공을 받으면 제 슛 성공률도 덩달아 올라갔습니다. 슈터로서 제가 해낸 업적중 상당수를 정아에게 돌리고 싶어요.

Q.무엇보다 대표팀에서 붙박이 슈터로 활약했어요.
선수 생활을 돌아봤을 때 가장 자랑스러운 것중 하나죠. 실업팀 들어가고 2년차 때부터인가 뽑히기 시작해서 은퇴 직전까지 계속 뛰었으니까 대표팀 생활은 참 오래했습니다. 당시에도 좋은 슈터는 많았어요. 다만 제가 중용될 수 있었던 이유를 찾아보자면 활용도가 높았던게 가장 큰 이유이지 않을까 싶어요.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슈터도 여러 가지 스타일이 있잖아요. 만들어준 찬스를 잘 해결하는 슈터가 있는가 하면 없는 찬스도 만들어서 어떻게든 해결지으려고 하는 슈터도 있어요. 제 입으로 제가 어떤 슈터였다고는 평가하기 어렵지만 후자가 되어보려고 노력은 많이 했습니다. 큰 국제대회에서 만나는 팀들은 전력에서 우리보다 강한 경우가 태반이거든요. 그런 강팀들과 상대하다보면 서로간 여유가 없어져요. 약속한 패턴이 있어도 힘세고 운동능력좋은 선수들의 압박을 받다보면 제대로 나오지가 않아요. 당장 이 순간 버티기가 힘들거든요. 그럴때면 슛찬스를 기다리기보다는 어떻게든 만들어보자는 독기가 먼저 나오더라고요.  

Q.국제무대에서는 키크고 운동능력좋은 외국선수도 많잖아요. 상대하기 어려웠을 듯 싶어요.
딱히 그런 것도 없었어요. 서양권 선수들이 체격조건, 운동능력 등에서 월등한 것은 사실이지만 저야 뭐…, 어차피 국내 무대서도 단신으로서 어려움이 많았는걸요. 작아서 어려운 것은 별반 차이 없었습니다. 제 농구 인생 자체가 신장과의 싸움이었으니까요. 국제대회 초창기에는 작은 체구를 보고 무시하는 선수들도 많았을거에요. ‘저 체격으로 뭘 할 수 있겠어’ 그랬겠죠. 하지만 저는 흑인이든 백인이든 상관하지않고 제 할것만 하자고 생각하고 플레이 했습니다. 저를 만만히 보는 것을 이용해서 찬스를 많이 만들어냈던 기억이 나요. 이후에 어느 정도 제 존재가 알려지면서 수비가 좀 더 강해지는 했지만 외국에도 저처럼 슛을 빠르게 쏘는 슈터가 많지는 않았나봐요. 본인들이 겪었던 슈터들과 슛 타이밍에서 차이가 많이 나니까 수비에 어려움이 많았지 않나 싶어요.(웃음) 물론 저 역시 그들의 긴 팔과 높은 점프력에 깜짝 놀라기도했고 부담스러웠던 적도 적지 않았어요. 겁도 나더라고요. 하지만 조심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으니까 신경쓰지 않고 저의 타이밍에서 슛을 쏘려고 노력했습니다.


 

 



Q.슈터 최경희의 최대 장점은 무엇이었을까요?
내구성같아요. 작은 체구를 커버하려고 그렇게 많이 뛰어다니고 허슬 플레이를 서슴치않았음에도 선수 시절 내내 특별한 부상이 없었습니다. 매 시즌 전경기에 가깝게 출전했고 국가대표역시 단 한번도 빠지지 않고 꼬박꼬박 나갔어요.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그렇게 강행군을 하고도 다치지않고 은퇴한 것이 참 신기하기도해요. 하늘이 큰 신장은 안줬지만 내구성은 준 것 같아요.(웃음)

Q.농구는 어떻게 시작하시게 된 것인가요?
서울 금호초등학교 5학년 시절 담임선생님이 농구부에 추천해주셨어요. 그때 당시 키가 149cm밖에 되지 않았지만 몸도 빠르고 뛰는 것은 잘했던지라 운동신경이 있다고 알아봐주시고 강력하게 밀어주신거죠. 무학여중 시절까지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어요. 키가 작다보니 포지션도 1, 2번을 오갔고요. 뭔가 제 자리를 잡지 못한거죠. 그러다가 은광여고 입학후 실력도 부쩍늘고 이름도 알려지게 됐어요. 당시 농구부에 182cm정도 되는 장신자가 딱 한명있었고 나머지는 전부 170cm이하였어요. 감독님께서는 단신 군단의 약점을 많이 뛰고 템포를 빨리 가져가는 방식으로 메우고자 하셨죠. 저같은 경우 스피드와 뛰는 것 만큼은 자신있던지라 당시 팀 색깔과 너무 잘맞았어요. 그동안 지독하게 연습했던 슈팅실력도 마음껏 뽐냈고요. 전국대회에서 우승도 하면서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게 됐습니다.

Q.마지막으로 여전히 농구인 최경희를 기억하고 사랑해주시는 팬분들에게 인사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3남 1녀의 엄마이자 한 가정의 주부로 살면서 오랫동안 농구를 잊고 지냈습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늘 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순간으로 살아숨쉬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최고가 되기위해 노력하고, 동료들과 함께 우승의 기쁨을 나누고, 무엇보다 제 슛 하나하나에 열광하고 응원해주셨던 팬분들의 마음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오랜시간이 지났어도 너무너무 감사드립니다. 쑥스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지만 지면을 빌어 응원 구호 한번 외쳐볼까 합니다. ‘한국 여자농구 파이팅!’, ‘한국의 모든 아줌마 파이팅!’(웃음) 언제나 건강하세요.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본인제공

기사제공 점프볼

김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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