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①] 최악 조건 떠안아 시간 필요.. '국내 감독 불신'도 큰 이유
▲ 세자르 한국 여자배구 대표팀 감독... 2022 세계선수권 대회 |
ⓒ 국제배구연맹 |
세계선수권에 출전했던 한국 여자배구 대표팀 선수들이 각자 소속팀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오는 22일 개막하는 2022-2023시즌 V리그 준비에 돌입했다.
그러나 이번 세계선수권 대회가 한국 여자배구의 현재와 미래에 던져준 메시지는 매우 컸다. 무엇보다 여자배구가 국제대회 경쟁력과 지금의 인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국내 프로 리그인 V리그에도 반드시 변화가 필요하다는 숙제를 남겼다.
한국은 지난 2일 새벽(아래 한국시간) 폴란드에서 펼쳐진 '2022 여자배구 세계선수권 대회' B조 조별 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크로아티아를 세트 스코어 3-1로 이겼다.
이 승리로 여자배구 대표팀은 세자르(45) 감독 부임 후 계속됐던 16연패 사슬을 끊어냈다. 또한 위태위태했던 '파리 올림픽 예선전 출전권'까지 획득하면서 배구 팬들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이날 경기 직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승리를 예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한 세트도 따내기 어렵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대표팀 감독과 선수들은 절박한 마음으로 똘똘 뭉쳐 기어코 승리를 따냈다.
대회를 마친 후 세자르 감독과 외국인 코치, 선수들까지 각자 SNS에 대회 소회와 감사를 표한 글을 올렸다. 그러자 프로배구 동료 선수들과 수많은 배구 팬들이 몰려가 "정말 고생 많았다, 수고했다"며 박수를 보냈다. '배구 황제' 김연경도 2일 자신의 SNS에 "올해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끝까지 함께 이겨내준 대표팀에게 감사합니다. 항상 관심 있게 지켜보며 응원하겠습니다"며 격려했다.
그래서일까. 지난 3일 인천국제공항 귀국 현장에선 세자르 감독과 대표팀 선수들 사이에 남다른 '동료애'마저 느껴졌다. 현장를 찾은 팬들이 올린 영상에 따르면, 세자르 감독과 대표팀 선수들은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일일이 포옹을 하며 작별 인사를 나눴다.
대한민국배구협회 관계자도 이를 인정했다. 최근 취재 결과, 배구협회 한 관계자는 "기본적으로 대표팀 선수들은 외국인 지도자에 대한 기대가 큰 편이고 선수들도 잘 따르는 것 같다. 특히, 체력 트레이너인 조반니 미알레에 대한 만족도는 매우 높다고 들었다"고 밝혔다. 이는 세자르호 대표팀 선수들의 각종 인터뷰에서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여자배구 팬들, 국내 감독 맹비난.. "외국인 감독에 비협조"
그런데 배구협회 관계자 등 배구계가 가장 놀라워하는 대목은 따로 있다. 바로 '배구 팬들의 반응'이다. 여자배구 대표팀이 16연패를 하는 동안, 보통의 경우는 누구보다 앞장서서 세자르 감독과 선수들을 맹비난했을 것이다.
그러나 올해 여자배구 팬들은 전혀 달랐다. 여자배구 팬 사이트 등에서 세자르 감독과 외국인 코칭스태프를 강력하게 지지하고 옹호하고 있다. 오히려 세자르 감독에게 불평·불만을 언론에 표출하며, 대표팀 선수 차출 등에서 비협조적인 모습을 보인 일부 국내 감독들을 향해 연일 비난하는 글들을 쏟아내고 있다.
지난 6일에도 하혜진 선수가 어깨 인대 파열로 '시즌 아웃'이라는 소식이 나오자, 여자배구 팬들은 하혜진의 소속팀인 페퍼저축은행 김형실(70) 감독을 강력 비난했다. 하혜진이 대표팀에 발탁됐을 때 바로 대표팀에 보내지 않고 KOVO컵 대회에 포지션 변경까지 해서 출전시켰고, 결국 팀 내 최고 공격 점유율과 최다 득점을 하면서 무리를 한 것이 부상이 악화된 가장 큰 원인이라며 쏘아붙였다. 심지어 페퍼저축은행을 응원하는 '팀 팬 사이트'에서조차 김형실 감독의 선수 관리 잘못을 비난하는 글들이 훨씬 많았다.
또한 여자배구 팬들은 지난 6일 배구협회와 한국배구연맹(KOVO) 사무실에 집단적으로 팩스를 보내는 '팩스 총공'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들은 "외국인 감독 흔들기 그만하고 뒤떨어진 국내 감독 지도력부터 지적하라", "맨날 외국인 감독 탓, 선수 탓, 팬 탓..국내 지도자들은 좋겠다. 남 탓만 해도 하루가 금방" 등의 문구를 담은 팩스를 보냈다.
'역대 최악 조건' 떠안은 외국인 감독.. 시간 필요
▲ '크로아티아전 승리 환호' 여자배구 대표팀 선수들과 조반니 미알레 코치(가운데) |
ⓒ 미알레 코치 SNS |
여자배구 팬들의 이런 반응에 대해 국내 감독과 프로구단 입장을 옹호해 온 인사들은 '편향된 팬심'이라며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러나 팬들의 글과 주장들을 살펴보면,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대목들이 적지 않다.
우선 한국 여자배구가 전 세계에서 가장 '극단적이고 강제적인 세대 교체'가 이뤄진 상황에서 선진 배구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외국인 코칭스태프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고, 배구계 전체가 적극 지원을 해주어야 한다는 데 공감대가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사실 한국 여자배구는 올해 대표팀 선수 구성 면에서 너무도 큰 공백이 발생했다. 세계 최고 완성형 공격수인 김연경(192cm)이 대표팀에서 은퇴한 것만으로도 엄청난 손실인데, 양효진(190cm), 김수지(188cm)까지 장신 트리오가 모두 은퇴했다. 설상가상으로 남아 있는 주전급 선수들마저 대거 부상과 건강상의 이유로 대표팀에서 이탈했다. 심지어 이번 세계선수권에 출전한 14명도 몸이 성한 선수가 거의 없었다.
어렵게 세계선수권 대표팀을 구성했지만, 이후 진천선수촌 훈련마저 외국인 감독과 국내 감독의 불협화음 등 때문에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전력이 가장 크게 약화된 나라가 대표팀 선수 구성과 배구계 전체의 훈련 지원 부분까지 다른 배구 강국들보다 부실했던 것이다(관련 기사: 세계선수권 4연패 여자배구... 예견된 시련).
그런 상황에서 감독의 능력만으로 단기간에 경기력을 배구 강국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없다는 건 삼척동자도 아는 일이다. 때문에 팬들은 올해 국제대회의 성적 부진을 세자르 감독과 외국인 코칭스태프에게만 전가하는 건 사리에 맞지 않다고 주장한다.
또한 남자배구와 여자배구 대표팀이 거둔 성적과 책임에 대한 평가가 공정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남자배구 대표팀은 올해 주전급 선수가 대부분 대표팀에 참가했다. 진천선수촌 소집훈련도 2개월이나 실시했다. 목표는 오직 하나였다. 지난 7월 서울 잠실학생체육관에서 열린 2022 남자배구 발리볼챌린저컵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해, 내년에 열리는 '2023 발리볼 네이션스 리그(VNL)'로 승격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준결승에서 튀르키예에 0-3으로 완패해 결승 진출에도 실패했다. VNL 승격의 꿈도 날아갔다.
이어 열린 8월 AVC컵 대회에선 더욱 충격이었다. '세계랭킹 70위' 바레인에 0-3으로 완패하면서 4위에 그치고 말았다. 그럼에도 국내 배구계 인사와 언론 어디에도 '임도헌 대표팀 감독 책임'을 거론하지 않았다.
반면, 여자배구 대표팀은 발리볼챌린저컵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급이 높은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그것도 최악의 상황에서 크로아티아를 3-1로 이겼다. 크로아티아는 지난 7월 열린 2022 여자배구 발리볼챌린저컵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내년 '2023 발리볼 네이션스 리그(VNL)'로 승격된 팀이다.
'국내 감독 불신' 팽배.. 본질적 문제들 담겨 있다
여자배구 팬들이 외국인 코칭스태프를 지지하는 이유는 또 있다. 바로 국내 감독들의 지도 스타일과 플레이 방식에 대한 불신·불만이 팽배해 있다는 점이다. 사실 이 부분이 가장 큰 이유로 보인다.
그 중심에는 국내 프로팀 감독들이 V리그에서 주도해 온 '외국인 선수 몰빵 배구'가 있다. 그러다 보니 국내 선수들이 세계 배구의 핵심 무기인 파이프 공격(중앙 후위 시간차 공격), 미들블로커 속공과 이동 공격 등 다양한 공격 옵션을 구사할 능력을 전혀 갖추지 못했다. 당연히 경기력이 V리그와 국제대회 사이에 현격한 격차가 날 수밖에 없다.
또한 플레이 스타일이 다르다 보니, 선수들이 대표팀에 들어갈 때마다 처음부터 다시 적응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발생한다. 설상가상으로 V리그와 사용하는 공인구도 다르다. 결국 대표팀에서 선진 배구 스타일을 연마했다고 해도 V리그로 돌아가면 다시 '도로아미타불 악순환'이 반복된다. 팬들은 또 국내 감독들이 6개월의 장기 리그에서 주전 선수 위주로만 팀 운영을 하기 때문에 시즌이 끝나면 부상자가 속출하고, 선수 발굴·육성에서도 뒤처졌다고 비판한다.
실제로 이런 본질적 문제들을 덮어둔 채, 다른 국제경쟁력 향상 방안을 논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다. 그래서 배구 팬들이 찾아간 통로(대안)가 바로 유럽·남미 배구 강국의 대세인 '토털 배구를 바탕으로 하는 스피드 배구'이고, 이를 구현할 지도자로 외국인 감독을 선호하게 된 것이다.
일각에선 "외국인 감독이 국내 배구를 무시한다"고 힐난하기도 한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국내 배구 스타일과 문화를 고수할 거면 애당초 외국인 감독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 그런 걸 과감하게 개선시켜 달라고 영입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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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제공 오마이뉴스
박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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