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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일 즐기던 고집불통, 뒤늦게 팀 플레이를 깨달았죠”

주간관리자 0

[김종수의 농구人터뷰(45)] '아트 덩커' 김효범

 

“제 농구 인생의 멘토는 바로 그분입니다”

최근 국내 농구에 대한 관심이 뜨거운 가운데 국가대표팀의 위상도 높아지는 분위기다. 장신 가드, 장신 포워드진으로 세대교체에 성공한 국가대표팀은 평균신장 196cm의 높이를 앞세워 2022 국제농구연맹(FIBA) 아시안컵에서도 위용을 떨치고 있다. 이를 입증하듯 중국, 대만, 바레인 등을 줄줄이 연파하며 B조 1위를 확정지었다. 포워드진의 핵심전력인 이현중, 여준석, 이승현 등이 빠진 상태서 거둔 성적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깊다.

그런 가운데 향후 국가대표팀의 중심에서 활약해줄 선수들이 입을 모아 멘토로 언급하는 선수가 있다. 다름아닌 김효범(39‧191cm) 서울 삼성 코치다. 삼성에서 육성코치로 일하고 있는 김코치의 영역은 단순히 소속팀에서만 머물지 않는다. 업무 자체는 삼성을 중심으로 돌아가겠지만 농구인 혹은 인간 김효범으로서의 영향력은 많은 농구 후배들에게 적지 않은 도움을 주고 있다는 평가다. 든든한 농구선배, 편한 형으로서 기대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로 그를 꼽는 후배가 적지 않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김코치는 2017년 6월 중국 항저우에서 있었던 '아시아태평양 팀 캠프' 당시 인솔자 겸 코치를 맡았다. 이현중, 여준석이 본격적으로 해외 진출에 대한 꿈을 꾸게 된 시기다. 이후 김코치는 이현중, 여준석을 비롯한 다수의 기대주들과 인연을 이어나갔고 어린 선수들이 힘들 때마다 조력자 혹은 조언자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현중의 모친 성정아씨는 “옆집 형같이 편한 선배가 관심을 가져주는 것은 직접 현장에서 부딪히는 관계자들과는 또 다르다. 상황에 따라서는 약점이 될 수 있는 부분까지도 털어놓고 조언을 받을 수 있는지라 심리적인 부분에서 큰 도움이 된다. 현중이에게 김코치님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해외 진출시부터 지금까지 좋을 때나 안 좋을 때나 변함없이 멘토로서 함께 해주고 있다”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이대성, 최준용 등 개성 강한 선수들까지도 김코치에 대해서만큼은 무한한 신뢰를 보내고 있다. 최준용은 지난 4월 프로농구 정규리그 MVP에 선정된 후 고마운 사람들을 언급하며 김코치의 이름도 빼놓지 않았다. 이대성 또한 “효범이 형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아왔다. 그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라며 여러 인터뷰를 통해 수시로 언급해왔다. 김코치에 대해서는 팬들 사이에서 본의 아니게 호불호가 갈리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가 한국농구 발전에 적지 않은 공헌을 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김코치는 선수 시절 KBL 최고의 슈팅가드 중 한명으로 활약해왔다. 2005년 신인드래프트에서 전체 2순위로 울산에 지명된 이후 국내리그를 대표하는 2번으로 명성을 떨쳤다. 가드로서 좋은 사이즈(당시 기준)에 빼어난 운동신경까지 갖춘 슈터이면서도 골밑에서 덩크를 펑펑 찍어댔다. 한창 폼이 좋을 때는 ’단신 외국인선수 급이다‘는 평가까지 받았다. 12시즌 동안 통산 4,997득점, 1,005리바운드, 630어시스트, 292스틸, 91블록슛으로 적지 않은 누적 기록을 남겼다.

 



“미국과 다른 한국의 육성 방식, 가르치면서 스스로도 배워나가고 있습니다”

Q.삼성에서 코치를 맡고 계십니다. 어떤 계기로 오시게 된 것입니까?

디트로이트 피스톤스 산하 G리그 그랜드 래피즈서 코치로 있었는데 코로나19로 G리그가 취소되면서 한국에 들어와 지내고 있었어요. 그렇지않아도 한국에 있는 가족이랑 떨어져 지내는게 맞는 것인가 고민이 많았거든요. 그러던 중 삼성에서 마침 연락이 왔어요. 차민석이라는 기대주가 있는데 훈련 좀 시켜줄 수 있냐고 하더라고요. 일종의 인스트럭터 개념이었고 그렇게 처음 인연을 맺게 되었죠. 민석이를 가르치던 중 2군 선수들의 훈련까지 봐주게 되었는데 어느새 한시즌이 훌쩍 지나가더라고요. 그렇게해서 다음 시즌 정식으로 코치가 되었습니다. 어찌보면 면접같은, 면접같지 않은 한시즌을 보냈던 것 같아요. 역할을 따지지 않고 열심히 하다 보니 좋게 봐주셨다고 생각합니다.

Q.인스트럭터 개념이면 다소 불안정하게 출발했을 것 같아요.
맞습니다. 하다보니 길어지기는 했지만 본래는 한달 계약이었어요. 누군가를 가르치면서 저도 배우는 것을 좋아하니까 일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만 파주에서 왔다 갔다 하려니 이런저런 외적인 부분에서 다소 애로가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임시직이나 다름없는 상황서 이사를 올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요. 그래서 정해진 기간만 하고 더 이상은 못하겠다고 말씀드렸는데 그동안 가르친 것이 마음에 드셨는지 정식으로 코치까지 맡게 되었습니다.

Q.어떤 부분을 담당하고 계시죠?
크게 나누면 선발과 육성파트가 있는데 저같은 경우는 처음에 인연을 맺었던 그대로 육성 쪽을 주로 담당하고 있습니다. 선발과 육성은 실과 바늘 같은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선수를 뽑아야 육성을 더 잘할 수 있는 것이고, 선발이 잘 되었다 하더라도 육성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잠재력과 재능을 모두 끌어 올릴 수 없으니까요. 마침 최근 삼성에서 좋은 기대주들을 다수 선발했고 저 역시 책임감을 느끼고 잘 키워보려고 노력 중입니다. 선수에 따라 상대성이 있어서 당장 결과가 나올 수도 있고 안 나올 수도 있어서 집중력과 더불어 길게 보는 시선도 필요한 자리인 듯 싶어요.

Q.아쉽게도 차민석 선수는 아직까지 알을 못깨고 있어요.
그러게요. 진심으로 잘되었으면 하는 선수인데 아직은 가야 할 길이 머네요. 제가 삼성과 일을 할 수 있는 계기 자체를 만들어준 선수이기도 한지라 더욱 신경이 쓰이는 것도 사실이에요. 이래저래 저도 책임을 통감하고 배워나가고 있습니다. 환경 자체도 G리그에서 코치할 때 하고는 확연히 다르니까요. 미국에 있을 때는 아무리 G리그라고 해도 대학에서 올컨퍼런스에 포함되었던 쟁쟁한 선수들까지 다수 있었거든요. 그런 선수들은 워낙 신체 능력도 대단하고 기술적으로 완성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서 멘탈만 조금 잡아주고 그래도 확 바뀌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 식으로 지도하다 보니까 ‘육성이라는 것이 크게 어렵지 않구나’하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지 않았나 싶어요. 환경과 리그가 바뀌면 달라지는 것이 더더욱 많을 수밖에 없는데 그런 점에서 깊게 다가서지 못한 부분도 있는 듯 싶어요.

 



Q.아무래도 서양권에서 농구를 배워와서 마인드적인 부분에서 프리한 요소도 많지 않을까 싶어요?
별로 그렇지도 않습니다. 일단 저는 훈련 등에 있어서는 그렇게 프리하지 않아요. 캐나다에서 학창시절을 보내기는 했지만 당장 저부터도 프로 생활을 한국에서 했으니까요. 저는 결코 해야 될 부분에 대해서 막 풀어주는 유형은 아닙니다. 아마 팀 내에서 저 대신 이것을 말해줄 분도 많을 것이라 생각합니다.(웃음) 자유라는 부분은 정해진 시스템 안에서 상황에 맞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지 코치의 마인드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독선적으로 하나하나 간섭하고 강요하는 스타일도 아니고요. 적절히 그런 것을 조절하는게 코치의 역할 같아요. 프로는 잘한 만큼 보상이 확실하잖아요. 그런 만큼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끌어올리려 알아서 프로그램을 짜서 몸 만들고 개인 훈련하는 선수들도 많이 늘었어요. 제가 그런 선수들과 함께 지낸 시절이 많다보니 프리하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만약 반대의 경우라면 꽤 달라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뭐니뭐니 해도 가장 이상적인 방향은 선수가 주도적으로 자신을 관리하고 지도자는 서포터하는 방식이 아닐까 싶습니다. 선수가 열정적이면 지도자 또한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고 싶고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커질 수밖에 없을 겁니다.

Q.선수들을 지도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무엇일까요?
이해입니다. 하나하나 따지고 들면 중요하지 않은 것이 어디 있겠냐 만은 일단 코치의 지시 나 조언을 선수가 제대로 이해해야 만이 받아들이는 폭 자체가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제 의견이 제대로 전달이 안됐거나 혹은 반영이 안됐다고 느낄시에도 육두문자를 써서 강압적으로 하기보다는 끝까지 이해시키려고 노력합니다. 억압하는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당장 그 순간은 변한 듯 보일지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그때뿐인 경우가 많아요. 반면 선수가 제대로 이해한다면 나중에라도 성장하고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높지 않을까 싶어요. 근데 말하다 보니까 당연한 것을 저만 특별한 것처럼 얘기한 듯 싶네요.(웃음) 그냥 너무 당연한 사항이고 저 또한 그 기본부터 충실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Q.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강제적인 방식에 익숙한 선수들도 적지 않다고 들었어요.
개인적으로 가장 크게 아쉬운 부분입니다. 솔직히 제 주변에서는 많이 보지 못했어요. 시대가 바뀌면서 그런 방식이나 사고를 가진 지도자분들도 많이 줄어든 것 같고요. 하지만 일부에서는 여전히 ‘강제성이 들어가야 성장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분들이 계시고 또 거기에 익숙한 선수들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오랜 시간 쌓인 방식이니까 한번에 다 고쳐지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아요. 하지만 성공한 선수들의 대부분은 스스로 알아서 하는 부분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어느 리그, 어느 선수든 마찬가지 아닐까요. 타의에 의한 움직임보다는 자율성이 강한 선수들이 많이 나올수록 전체적 수준이 올라간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소수가 아닌 다수가 되기를 바래봅니다.

 



Q.당연한 말이겠지만 미국에서는 그런 자율성을 가진 선수들이 엄청 많겠죠?
그렇죠. 어느 정도 지도자의 간섭은 들어 가겠지만 전반전인 농구 문화 자체에서는 자율성의 비중이 매우 높죠. 특별한 마인드를 가진 선수들이 많다기보다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도 커요. 간섭이나 강요를 적게 하는 대신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가차없이 잘라내버려요. 구태여 NBA 스타들로 비교하지 않아도 G리그 등지에도 신체능력, 재능이 높은 선수들이 엄청 많아요. 내가 그만큼 성장하지 못하면 기회를 못 받는 구조인거죠. 지도자들도 아쉬울게 없습니다. 이 친구가 따라오지 못하면 따라오는 다른 친구를 쓰면 되니까요. 내가 아니면 안된다가 어지간하면 통하지 않습니다. 결국 가장 굶주린 선수가 기회를 많이 받고 성공하게 되더라고요. 최근에는 국내 선수들도 그런 마인드를 가진 케이스가 늘고 있는 것 같아요. 듣기로는 이번 아시안컵 국가대표팀 선수들 중에서도 출국 전날에 개인 훈련을 본 훈련 이상으로 소화한 선수들도 있다고 들었어요. 출국 전날에는 팀 훈련을 할 수가 없는데 그 시간도 아까워서 훈련을 했다는 자체에서 농구에 대한 열정이 느껴집니다.

“각 선수의 색깔에 맞게 장신화가 이뤄지는 추세는 매우 좋아 보입니다”

Q.최근 팀 성적이 부진했고, 이상민 전 감독마저 팀을 나가게 되면서 여러모로 마음이 안 좋으셨을 것 같아요.

그렇죠. 심적으로 많이 무거웠습니다. 팀 성적도 그렇고 전 감독님께서도 그만두게 되시면서 저뿐 아니라 코치진 전체가 책임감도 느꼈습니다. 거기에 코트 밖에서 사고까지 터져서 ‘도대체 관리를 어떻게 한거야?’등의 말도 나왔죠. 다들 힘들었을 겁니다. 저 역시 너무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나서 개인적으로도 충격을 좀 먹었습니다. ‘내가 이것을 하는게 맞나? 자격과 능력은 있는건가?’라는 생각도 들 정도였어요. 이상민 감독님께서는 코치와 선수진을 정말 배려를 많이 해주셨던 분이세요. ‘이 정도 까지?’라는 생각이 들었던 유일한 분이시니까요. 선수들이 많이 행복해하고 심적으로도 편하게 지냈던 것 같아요. 많이 아쉽죠. 선수들도 편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고 감사하게 느끼는 마음이 부족하지 않았나 싶어요. 그렇게 배려심이 많은 감독님이 계시면 누가 가장 좋겠어요. 선수들이겠죠. 어쨌거나 그것은 누구 한 사람의 잘못은 아닐거에요. 익숙함으로 인해 소중함을 잊는 경우는 저희 삶에도 많으니까요.

Q.뚜껑은 열어보지 않았지만 신임 은희석 감독에 대한 기대의 목소리도 커요.
능력이 좋으신 분 같아요. 체계적 시스템을 통해 현재 팀에 필요한 부분을 하나씩 본인만의 스타일로 다잡고 계신 듯 싶습니다. 덕분에 옆에서 리더십, 소통방식, 경영적인 부분 등에서 많이 배우고 있어요. 전임 이상민 감독님께서도 장점이 많으셨지만 은희석 감독님께서도 본인만의 강점이 뚜렷하신 것 같아요. 어쨌든 신임 감독님 체제로 팀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고 다들 더욱 마음을 다 잡고 있으니 새 시즌부터는 새로운 삼성의 모습도 기대됩니다.

 



Q.선수 생활하실 무렵 장신 2번 소리도 많이 들었잖아요. 이제는 다들 커져서 코치님이 지금 시대에 뛰시면 명함도 못 내미실 듯 싶어요.
그러게요. 맞습니다.(웃음) 슈팅가드를 보던 그때는 그런 소리도 종종 들었죠. 하지만 이제는 다들 엄청 커졌잖아요. 190cm대 가드도 엄청 많으니까요. 제가 맨발로 189cm 정도 되는데, 멀리 볼 것도 없이 당장 이번 대표팀만 보더라도 변화폭이 바로 느껴져요. 1번 역할도 많이 하는 (이)우석이가 196cm, (이)대성이도 193cm이잖아요. 다들 맨발 신장도 저보다 크죠. 저희팀의 (이)동엽이도 193cm~194cm정도 나오고요. 엄청난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신장이 조금만 있어도 빅맨 쪽으로 성장시키려 했지만 이제는 추세가 ‘장신이라도 가드나 스윙맨이 가능하다’는 인식이 자리 잡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어린 친구들도 일찍부터 자신에게 맞는 포지션에서 훈련하고 있는 분위기고요.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장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에게 맞는 적성을 찾아야 더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아시다시피 포워드진도 그 이상으로 변화했고요. 2m가 훌쩍 넘는 신장에 프레임도 큰 나무 같은 빅맨이 적어서 그렇지 가드, 포워드진은 완전히 달라진 듯 싶습니다.

Q.그런 점에서 차민석도 여전히 장신 포워드로 기대가 큽니다.
많은 분들이 차민석의 장점으로 꼽는 부분은 어린 나이와 사이즈(199.6cm)잖아요. 특히 사이즈 적인 부분은 노력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타고난 요소인지라 그 자체가 장점인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비슷한 장점을 가진 선수들이 많아지는지라 더욱 분발해야겠죠. 주변에서는 민석이가 4번은 물론 3번까지 볼 수 있어야 경쟁력을 가질 것이다는 의견도 많아요. 하지만 이 친구는 고등학교 때까지 5번을 봤어요. 거기에서 오는 괴리감도 분명 있을것이단 말이에요. 그러한 점에서 변화를 주려면 훈련량도 훈련량이지만 한 시즌 정도는 리빌딩을 해야하는 수준으로 가야 제대로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그만큼 플레이 스타일의 변화는 어려운 부분이에요. 현재 이 친구의 사이즈로는 4번에서도 경쟁력이 높다고 할 수는 없는지라 3번으로 성장하기에는 외곽슛 등의 문제도 있어서 이래저래 쉽지않은 상황입니다. (송)교창이같은 경우 삼일상고 시절에도 3번 역할을 많이 했어요. 외곽슛도 많이 쏘고 2대2게임도 하고 스크린 상황에서 스크리너가 아닌 볼핸들러로 활약했거든요. (양)홍석이, (이)현중이, (여)준석이도 마찬가지고요. 교창이의 순간 스피드, 현중이의 활동량과 슈팅능력, 홍석이의 단단함, 준석이의 운동능력 등 장신포워드로 자리를 잡은 선수들은 하나같이 자신만의 확실한 장점이 있어요. 그런 점에서 민석이도 자신이 잘하는 것을 확실히 만들어서 경쟁력을 키워나가야죠. 올 시즌이 터닝포인트가 될 것 같아요.

 



“캐나다와 미국에서의 생활, 끊임없이 적응해야 했습니다”

Q.초등학교 5학년 때 가족 전체가 캐나다로 이민을 갔어요. 적응에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국내리그에서의 선수 활동도 그렇고 이후 G리그에서의 코치 생활까지…, 저는 항상 적응을 하면서 살아왔던 것 같아요. 어찌보면 자의가 아닌 부모님의 선택으로 간 것이잖아요. 그때 나이도 11살이었고 아무리 적응을 위해 노력한다 해도 시간은 조금 필요하더라고요. 어느 정도 적응하기까지 1년 가량 걸린 듯 싶어요. 영어도 못하던 상태였던지라 한동안은 벙어리로 지냈고요. 동양인인데다가 영어까지 못하니 얼마나 무시당했겠어요. 그나마 어릴 때인지라 여러 가지를 스폰지처럼 잘 빨아들이면서 적응하지 않았나 싶어요. 처음 들어간 초등학교에는 한국학생 한명, 중국 학생 한명해서 아시아인이 저 포함해서 3명 있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한국 학생 또한 미국에 온지 1년 남짓 밖에 안된 친구라서 함께 지내면서 위로도 받고 적응을 하게 됐죠. 처음에는 많이 싸웠던 것 같아요. 외모가 낯선 것은 둘째치고 말부터 어눌하게 들릴테니까요. 발음이 새거나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엉뚱한 대답을 하면 놀림거리가 되더라고요. 오랫동안 눈치를 보면서 지냈어요.

Q.그쪽 문화 자체가 약하게 보이면 놀리거나 무시하는 성향이 강하지 않나요?
아무래도 그런게 좀 있습니다. 캐나다에 있을 때는 그나마 덜했어요. 제가 운이 좋았던 탓인지 주변에 착한 친구들이 많았거든요. 이후에 대학 때문에 미국에서 생활할 당시 그런 점에서 조금 힘들었습니다. 제가 느낀 미국 친구들은 이른바 생활에서도 연기를 잘했어요. 강한 척도 하고 이런저런 부분에서 피곤할 정도로 연기가 섞인 언행이 들어가요. 그런 부분에서 적응이 힘들었어요. 어리면 어린 데로 생각 없는 말도 뱉고 실수도 하고 그러잖아요. 어찌보면 어리니까 그런 건데 제가 겪은 미국 학생들은 그러지 않았어요. 늘 누군가를 신경쓰고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도 의미가 들어가요. 좋게 보면 실수를 하지 않고 얕잡아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저는 참 힘들더라고요. 심지어 누군가가 웃기려고 농담을 하면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어느 정도 계산이 들어가고 긴장해야 하는 경우도 있어요. 웃기려는 사람은 이 타이밍에서 웃긴 말을 던지려고 타이밍을 재고 있고, 듣는 사람들도 거기에 걸맞는 반응이나 리액션을 준비해야죠. 적응과의 싸움은 G리그에서 코치할 때도 계속됐어요. 한국같은 경우는 말 실수를 하거나 버벅거려도 알아서 넘겨 듣거나 그런 경우도 있잖아요. 하지만 미국 사회에서는 실수를 실수로 안 넘길 때가 많아요. 그러다 보니 각자가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도 극도로 조심하게 되더라고요. 그러면서도 농담도 적절하게 활용하면서 유머있는 척, 위트있는 척 해야 되는 부분도 필요합니다.

 



Q.그런 점에서는 이현중도 대단한 듯 싶어요. 늦은 나이에 해외로 갔잖아요.
맞습니다. 현중이 요새 능숙하게 인터뷰하는 것 보면 정말 대단하게 느껴져요. 제가 뼈아프게 경험해봤잖아요. ‘저 정도 수준급으로 인터뷰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창피함과 이런저런 심적 고통을 겪었을까 싶어요. 저도 라이브 인터뷰를 G리그 때 해본 적이 있었거든요. 현중이처럼 ESPN이 아니라 트위치라고 페이스북과 연동되어 진행되는 프로그램이었는데요. 중계차랑 다 와가지고 여성 아나운서분과 하프타임 때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저는 그것조차 힘들었거든요. 그런 점에서 현중이가 라이브로 헤드샷 차고 능숙하게 인터뷰하는 것 보니까 신기하더라고요. 정말 노력 많이 하고 빨리 늘었구나 싶었어요. (이)대성이도 이번에 보니까 아시안컵 대만전 끝나고 영어로 인터뷰했더라고요. 영어가 빨리 늘기 위해서는 노력도 노력이지만 용기도 정말 중요해요. 한국어로 인터뷰해도 버벅거리거나 못 알아 들을 때가 있거든요. 하물며 영어로 하다보면 그런 경우가 훨씬 많겠죠. ‘실수 좀 하면 어때’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어느 정도는 뻔뻔한 마인드로 무장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요새 후배들이 대범하고 대단한 것 같아요.

Q.농구는 어떤 계기로 시작하게 됐나요?
캐나다 갔을 무렵부터 시작했어요. 의사 소통도 안되서 친구 사귀기도 어렵고 이래저래 적응이 힘든 상황에서 뭔가 할 수 있는게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나마 당시 또래 중에서 키도 크고 운동능력도 좋은 편이라 저에게는 적응의 좋은 수단이 됐죠. 캐나다, 미국 등 서양 사회가 운동문화가 발전했잖아요. 그나마 운동을 잘하면 어느 정도는 인정해주는 부분도 있어요. 한국처럼 엘리트 스포츠 시스템은 아니고 레크레이션 성격이지만 거기서 두각을 나타내면 트라이아웃도 참가하고 상위학교에서 관심도 보이고 그래요. 저도 거기서 뽑혀서 대회도 나가고 그랬습니다. 미국은 한국이랑 학년제가 조금 다르잖아요. 7학년 때 근처 고등학교에서 스카웃제의가 들어왔어요. ’너 우리 학교로 전학올래?‘ 사실 그것마저도 엘리트 개념은 아니에요. 그냥 농구팀을 바꾸는 정도죠. 어쨌거나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농구를 하게 된 것 같아요.

Q.흑인, 백인들과 농구하면서 신체적인 어려움은 느끼지 않았나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별반 어려움은 느끼지 않았어요. 다만 기본기부터 체계적으로 농구를 배웠어야 하는데 개인기 위주로 하다 보니까 팀 플레이에 맞는 여러 가지 부분을 제대로 습득하지 못한 점이 다소 아쉬워요. 학교적인 부분도 그랬겠지만 당시 세대가 또 일대일을 많이 하던 스타일이 유행이었어요. 앨런 아이버슨이나 코비 브라이언트같은 스타들이 인기를 끌었고요. 요즘이야 팀 플레이가 주축이 된 스타일이 대세지만 당시에는 그랬어요. 그때는 그 시절만의 로망이 있었던 거죠. 어쨌거나 아이버슨이나 코비는 워낙 잘하는 선수들이었으니까 무슨 농구에도 잘 적응했겠지만 저 같은 경우는 좀 더 시스템적인 농구를 배웠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이후 대학을 디비전1으로 가면서 뼈져리게 느꼈어요. ’아…, 내가 정말 농구를 못하는구나‘ 몸은 좋은데 기술이나 기타 사항에서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었어요.

 



“너무 늦게 팀 플레이에 눈을 떴습니다”

Q.당시에도 포지션은 슈팅가드였죠?

그게 저의 가장 큰 실수였던 것 같아요. 그곳에서 2번을 보기에는 언더사이즈였죠. 신장만 놓고 봤을 때는 포인트가드가 훨씬 경쟁력이 있었다고 봅니다. 사실 기회가 있었는데 제가 고집을 부리고 말을 안 들었죠. 당시 시대를 이끌어갔던 선수들처럼 저 역시 득점을 주도하는 에이스 역할을 하고 싶은 마음이 컸던 듯 싶어요. 볼을 잡으면 슛을 쏘던가 일대일을 시도하던가 어떻게든 스스로 해결하려는 본능이 높았습니다. 좀 막무가내로 힘든 농구를 했죠. 주변도 돌아보면서 템포조절도 하고 그랬어야 하는데요. 대학리그를 뛰면서 미래를 준비하던 시절 어릴 때부터 인연이 있던 어떤 베테랑 코치께서 ‘너는 1번을 봐도 괜찮을 것 같다. 볼 운반만 안정적으로 하고 패스만 정확하게 하면 쓰임새가 있을 것이다’고 조언을 해주셨거든요. 하지만 우려반 고집반으로 그 말씀을 따르지 않은 것이 후회도 됩니다. 제가 좀…, 멍청했죠.(웃음)

Q.독하게 1번만 고집하는 이대성에게 자신감을 주는 조언도 많이 했다고 들었어요. 본인이 1번을 못했던 아쉬움도 영향이 있었을까요?
음…, 사실 그런 부분을 강요는 안했어요. 각자가 알아서 할 일이니까요. 하지만 다들 아시다시피 1번에 대한 (이)대성이의 집념이 강하잖아요. 본인이 절실히 원하고 그만큼 엄청난 노력을 하는데 그 자체를 응원해주는게 맞다고 생각해요. 어차피 선택도 결과도 본인의 몫이잖아요. 중요한 것은 대성이는 단순히 꿈을 꾸는데 머무르지 않고 그 길을 위해 정말 죽어라 노력하는 선수라는 점이에요. 사실 대성이가 대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잘 몰랐어요. 상무제대 후에 처음 만났어요. 이미 당시에 장신가드가 되고 싶던 대성이의 신념은 잡혀있었던 것 같아요. 대성이를 보면서 저 자신도 다시금 돌아보게 됐어요. 당시 1번 전향 조언을 들었을 때 따랐으면 저의 농구 인생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고요.(웃음)

Q.미국에서 생각하는 1번과 국내에서 생각하는 1번은 다른가요?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크지 않아요. 시대의 흐름이 영향이 더 컸다고 생각합니다. 미국도 예전에는 퓨어가드라고해서 패스를 먼저 생각하는 1번을 선호했어요. 본인 찬스가 나도 슛을 자제하고 동료의 찬스를 보는 플레이를 많이 추구했죠. 팀내 주 득점원을 보조해주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그러다가 최근 추세는 능력만 있으면 주득점원으로 뛰기도 하는 쪽으로 흐름이 변하게 된거죠. 현재 잘나가는 NBA 1번들을 보면 에이스롤을 맡는 선수도 많잖아요. 국내도 마찬가지고요.

Q.모비스 시절에도 공격본능은 넘쳤지만 나름 팀에 잘 융화되는 플레이를 했다고 기억되요.
그것은 유재학 감독님께서 저의 사용법을 어느 정도 만들어주신 영향도 커요. 공격이 막 시작되려는 찰나에 공을 잡으면 의도적으로 볼을 좀 돌리는데, 단 7초 안으로 시간이 남을 경우에는 하고 싶은데로 일대일을 마음껏 하라고 하셨거든요. 어찌보면 저란 선수를 잘 활용하셨던거죠. 워낙 일직선으로 돌파를 하다 보니까 공격이 막히거나 그러면 이후에 어떻게 플레이를 해야 할지 잘 몰랐어요. 순간적으로 앞이 캄캄해지더라고요. 나중에 연차가 쌓이다 보니까 패스가 나오는 각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아쉽게도 이것을 너무 늦게 알았어요. 때로는 꼭 득점을 위한 돌파가 아니라 상대를 속이고 패스 타이밍을 만들어내는 방식도 있다는 것을요. 그렇게 하면 에너지소모도 적고 득점확률도 높일 수 있거든요. 상대 수비를 이지선다형으로 괴롭힐 수 있으니까요. 이대일 플레이를 탑재하면 공격이 더 쉬워진다는 것을 전주 KCC 시절 척 퍼슨 코치님을 만나면서 깨닫게 되었어요.

 



Q.뱅가드 대학을 선택한 배경이 궁금합니다.
본래는 롱비치스테이트로 가려고 했어요. 남부 캘리포니아에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으로 편입을 하려면 1년을 쉬어야 된다고 하더라고요. 운동하던 학생들에게 적용되던 룰이었습니다. 농구를 하든 안하든 그렇게 시간을 보내기는 싫었습니다. 정상적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싶은 마음뿐이었죠. 뱅가드 대학같은 경우 NAIA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룰의 제한을 받지 않았어요. 그래서 선택하게 된거죠. 수준은 NCAA 디비전2 정도고요. 크리스찬 등 종교적인 색깔을 띄고 있는 학교들이 많아요. NAIA 자체가 국내에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국내 대학리그보다 수준이 더 낮다는 말도 나오고 그랬는데 그렇지는 않아요. 미국은 선수층이 워낙 넓기 때문에 정말 빼어난 선수도 의외의 곳에서 뛰고 그러거든요. 실제로 G리그 코치 시절 저희팀 주전 4번이 NCAA 디비전3에서 뛰던 선수에요. 처음에는 저도 그런 편견이 살짝 있었지만 경기하는 것을 보니 ‘실제로 보기 전에는 선입견을 가져서는 안되겠구나’싶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Q.KBL 드래프트는 어떻게 참가하게 되었나요?
한국계 에이전트인 존 킴을 통해서 정보를 얻고 도움을 받았어요. 농구뿐 아니라 야구 쪽에서도 유명한 에이전트에요. 국내에서는 야구 레전드 이승엽 선배님의 에이전트를 맡았던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을거에요. 당시 대학리그에서 뛰면서 참가신청서를 냈는데 예상외로 높은 2순위로 뽑혀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나요. 그 정도까지는 기대를 안했었거든요. 그렇게 제가 먼저 KBL에 입성하고 이후 같은 소속사인 이승준도 들어올 뻔 했지만 사정이 생겨서 동생 이동준이 대신 드래프트를 신청한바 있죠. 공교롭게도 동준이 형도 2순위로 지명받았었네요.

Q.팀 플레이가 빡빡하기로 유명한 모비스에 지명된 것은 행운이었을까요?
행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모비스에서 저의 사용법을 잘 가져갔거든요. 아마 유재학 감독님, 임근배 코치님이 아닌 다른 팀 지도자 분들 같았으면 저를 포기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해요. 특히 제가 지도자가 되어 보니까 더 절실하게 느끼는 것 같아요. 일대일에 특화된 고집 강한 어린 친구가 있다면 어떻게 가르쳐야 될까 생각해보니까 저도 한숨이 나오는 것 있죠.(웃음) 다만 나름의 강점은 확실했습니다. 몸이 좋았고 잘 뛰고 점프도 좋고 원석같은 느낌은 들어서 가르쳐보고는 싶었을 것도 같아요.

Q.어쩌면 코치님을 먼저 경험했으니까 개성 강한 이대성도 모비스에서 잘 써먹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
말을 듣고 나니 노하우로 작용했을까? 싶기는 하지만 그래봤자 얼마나 참고가 됐겠어요. 그냥 유재학 감독님은 다양한 선수를 팀 시스템 속에 녹아들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출중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성이는 저보다 농구를 더 사랑하는 선수에요. 그래서 저랑은 좀 색깔이 다른 것같아요. 온통 농구만 생각하고 농구에 대해서만큼은 광기가 느껴질 정도에요. 그런 부분에서는 모비스가 저보다는 대성이를 다루기 더 쉽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선수 개인의 개성을 떠나서 농구에 대한 열정 자체가 너무 대단한 선수니까요. 저도 자존심이 있는지라 웬만해서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대성이의 농구에 대한 그것은 박수를 보낼만합니다.

 



“국가대표 논란, 어린 나이에 좀 더 신중한 언행이 아쉬웠습니다”

Q.캐나다에 있던 시절에 청소년 국가대표로 뽑힐뻔했는데 한국 국가대표를 염두에 두고 거절했다고 들었어요.

어떻게 하다 보니 좋은 쪽으로 미화 되서 와전된 것 같은데 사실과 다릅니다. 저는 대단한 선수가 아니었던지라 무엇인가를 돌아보면서 선택할 여유는 없었습니다. 일단 청소년대표는 거론된 적이 없고요. 포틀랜드 대학교 2학년 때 국가대표 상비군 멤버에 들어갔는데 불과 5일 만에 짤렸습니다. 여름방학 때 참가하라고 오퍼가 와서 트레이닝 캠프에 참가했지만 일정도 못 마치고 중간에 컷 당한 거죠. 그때 스티브 내쉬도 있었고 현재 뉴욕 닉스에서 뛰고 있는 RJ 배럿의 아버지도 함께 했던 기억이 납니다. 금방 나가기는 했지만 그래도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웃음)

Q.한창 기량이 좋았을 때 국가대표 얘기가 나왔는데 군 문제가 걸리면서 결국 흐지부지됐고 지금까지도 팬들에게 좋지 않은 이미지를 찍게 됐어요.
당시 상황이 여러 가지로 복잡했어요. 그때 허리가 매우 아파서 수술을 받고 공익판정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어쨌거나 국적회복을 해서 공익을 갈거냐 상무를 갈거냐 결정을 해야만 했죠. 공익을 가면 국가대표를 못 뛰고 상무를 가야만이 국가대표로 뛸 수 있는 상황이었어요. 하지만 공익을 가야 할 자원이 상무를 가서 혹시라도 허리가 더 나빠지거나 다치면 거기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스스로 져야 했습니다. 고민이 많아지더라고요.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서 구단, 감독님 등과 상의를 한 후 최종적으로 결정을 하게 됐죠. 이런저런 말을 붙여봤자 의미 없는 변명이 될 것 같고 당시 상황이 그랬습니다.

Q.‘내가 군대를 가야 되면 가족의 생계는 누가 책임져야 되는가?’라는 말이 기사화되면서 팬들의 원성이 더 커졌어요.
저에 대한 군대 문제가 불거지게 된 여러 가지 이유 중 이른바 ‘교포 혜택’도 무시할 수는 없었을거에요. 캐나다 국적이기는 하지만 부모님이 모두 한국인이고 저 역시 출생지가 한국인지라 특별법의 수혜를 받은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혜택은 혜택대로 받고 병역의 의무는 나 몰라라 한다고 비난을 받았죠. 충분히 나올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저 역시 마음이 무겁습니다. 가족 생계에 대한 언급은 저도 기억이 납니다. 아마 SK 시절이었던 것 같아요. 토시 하나 틀리지 않게 직접적으로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비슷한 뉘앙스로 발언을 내뱉기는 했습니다. 당시 어리기도 했고 말을 참 못했던 듯 싶어요. 말이라는게 아 다르고 어 다르잖아요. 이후로는 말을 아끼고 신중하게 답변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사실 이 문제는 따로 언급하지 않아도 꼬리표처럼 따라 다닐거고 저 역시 할말이 많이 없는 부분입니다. 팬분들에게 큰 실망을 준 것은 사실이니까요. 다만 항상 조심스러운 것은 그런 말이 나올 때마다 가족들이 마음 아파해서 그런 부분에서 살짝 우려도 됩니다.



“트라우마와 두려움을 이기며 성장하고 있습니다”

Q.G리그 코치는 어떻게 해서 하게 된 것 인가요?

본래 지도자 쪽에 관심이 많아서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어요. 특히 크리스 리(한국명 이승호)라고 PGA(미국 프로골프) 부사장으로 계신 분이 있으세요. 승호형을 통해서 NBA관계자분들을 알게 되었고 그렇게 작은 인맥부터 쌓아 나갔죠. 그리고 그분들의 추천으로 2017년 6월 중국 항저우에서 있었던 '아시아태평양 팀 캠프'의 인솔자 겸 코치를 맡을 수 있었어요. 그때 이현중, 여준석, 차민석 등과 인연도 맺었고요. 당시 저랑 같이 아이들을 지도했던 분이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찰스 클래스크 어시스턴트 코치였거든요. 제가 이것저것 준비한 것을 보고 코치님이 저보고 알아서 감독 역할을 하라고 맡겨주셨어요. 초짜라 서툰 것도 많았겠지만 나름 열심히 했고 그 모습을 좋게 봐주신 것 같아요. 저에게 ‘지도자 과정을 배우고 싶냐?’고 물어보셨고 ‘그렇다’고 대답하니까 G리그에 추천서를 넣어주신다면서 이력서 준비하고 면접공부도 하라고 하시더라고요. 이에 모비스 유재학 감독님께 양해를 구하고 계약 기간이 1년 남은 상태였지만 선수로서 은퇴를 결정했습니다. 단 지도자로서 취직을 하고 싶으면 대학졸업장이 필요하다고 해서 바로 뱅가드 대학으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Q.일사천리로 잘 풀린 것 같네요?
좋은 분들을 만나서 인연의 끈은 잘 잡았지만 그 과정이 결코 순탄치는 않았습니다. 어디까지나 추천을 해준다는 것이지 무조건 써준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으니까요. 학비만 개인 돈으로 거의 1억을 썼습니다. 2017년 9월에 사비로 비행기를 타고 디트로이트에 가서 1차 면접을 보고 캘리포니아로 돌아온 후 12월에 다시 연락이 와서 2차 면접을 봤어요. 영하 30도까지 떨어졌을 정도로 겨울 날씨가 엄청 춥더라고요. 이후에도 하염없는 기다림의 연속이었습니다. 캘리포니아에서 쭉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다음 년도 8월 중순에 연락이 오더라고요. 3차면접은 필요 없고 너로 가기로 결정 했다고 최종적으로 답을 줬고 그 순간 너무 좋아서 카페에서 소리를 질러대며 기뻐했던 기억이 납니다. ‘열흘 안에 짐을 빼서 올 수 있냐?’고 물어봤는데 어쩌겠어요. 아쉬운 쪽은 저인데 무조건 된다고 했죠. 기다리는 시간은 엄청 길었는데 갑자기 결정하더니 또 엄청 서두르더라고요. 다행히 휴직을 하고 미국으로 와준 아내가 준비를 잘해줘서 힘겹게 짐을 옮길 수 있었습니다. 정말 그때 아내 고생 많았죠. ‘이게 정말 맞는거냐?’하면서 툴툴거리기도 했지만 섬세하게 이것저것 챙겨주고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너무너무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아내 없었으면 G리그 못갔을거에요. 최고의 아내이자 최고의 매니저입니다.

Q.면접 기다리는 시간 동안은 경제 활동도 못했을 것 같아요.
그렇죠. 아무 것도 못 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일종의 백수 상태였다고 보는게 맞을 겁니다. 하지만 마냥 놀지는 않았습니다. 그 기간 동안에 농구 이론과 전문용어 등을 반복적으로 계속 공부했고 틈틈이 동네 인근을 돌며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어요. G리그 코치로 간다 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소통과 전달능력이었으니까요. 당연히 돈은 안받았고요. ‘안녕, 나는 브라이언이라고 하는데 너는 이름이 뭐고 어느 고등학교 다니니? 나 한국에서 프로선수 생활 12년 정도 했는데 나한테 한번 배워볼래?’라면서 제가 먼저 다가갔습니다. 그러면서 아이들 먹을 것도 사주는 등 수입은 없고 지출만 계속되던 시절이었죠. 다행히 수중에 돈이 거의 떨어져 갈 때쯤 연락이 와서 더 극적이었던 듯 싶어요. 아내가 현명한게 ‘우리가 돈이 이만큼 있으니 이것을 초과하게 되면 다시 돌아오는 것으로 하자’며 미국 가기 전부터 상한선을 정하더라고요. 더불어 ‘만약 돈을 다 쓸 때까지도 연락이 안 오면 실패가 아닌 잔고가 없어서 돌아오는거야. 그때까지는 하고 싶은 데로 다해봐“라고 말해 주는데 정말 큰 힘이 됐습니다. 제 인생의 가장 큰 축복은 지금의 아내를 만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Q.G리그 코치 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너무 만만치 않은 곳이라 솔직히 말하면 다 힘들었습니다.(웃음) 그중에서도 선수들에게 코치로 인정받는 과정이 가장 어려웠다고 기억해요. 프라이드가 강한 선수들이 워낙 많아서인지 코치 직함만 가지고 있다고 바로 인정해주지 않더라고요. ‘너 누구야?’라고 물어보는 친구들도 있었고 ‘내가 얼마나 유망주인데 너가 나를 가르쳐?’이런 느낌으로 쳐다보거나 대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어요. 하루에도 수십 번 씩 자존감이 바닥까지 곤두박질쳤습니다. 그래도 코치 역할을 해야 하기에 나름 표정 관리하면서 옆에서 열심히 독려도 해주고 그랬지만 마음은 그야말로 만신창이였던 시절이죠.

Q.그래도 악착같이 버티셨어요.
버텨야죠. 어떻게 들어간 코치 자리인데요. 그래도 운이 좋았던게 당시 어시스턴트 코치분들 중 상당수가 경력이 매우 높은 분들이셨어요. 거의 할아버지, 아버지뻘이었죠. 저는 육성코치였지만 코치친 숫자가 부족한 관계로 어시스턴트 코치 역할도 함께 했습니다. 어쨌든 그런 분들의 노하우를 현장에서 배울 기회는 흔치 않은지라 아들처럼 행동하면서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노력했죠. 그런 와중에도 별일이 다 있었습니다. 제가 주도하는 비디오 미팅이 있었는데 엄청 버벅거렸어요. 시즌 첫 경기인데다가 NBA선수가 4명이나 내려온거에요. 선수만 16명에 디트로이트 부단장님께서 오시고 사무국 관계자들도 있고 거의 30명의 인원이 저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렇지않아도 떨렸는데 완전 긴장되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당황에서 말도 잘 안 나오고 단어선택도 잘못되고 완전히 꼬여버렸습니다. 속으로 ‘망했다’고 생각했죠. 그런 제 모습이 안 되어 보였는지 퍼포먼스 코치가 다가와서 ‘괜찮아. 다음에는 목소리만 좀 더 크게 내’하고 어깨를 툭치고 가더라고요. 솔직히 위로가 되었겠어요? 혼자 화장실 가서 입막고 펑펑 울었습니다.

Q.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코치로서 성장했군요?
다른 유능한 코치들과 비교하면 여전히 부족한 것 투성이겠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성장을 많이했죠. 처음 1년 동안은 시간이 어떻게 간지도 모를 정도였어요. 실수가 반복되다 보니까 트라우마 같은 것도 생기고 ‘과연 열정만으로 내가 이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라는 의문까지 들었습니다. 무섭고, 두렵고…, 선수들 불러서 작전판에다가 그림 그려가면서 열심히 설명해도 대꾸도 안하고 돌아가던가 반박이 쏟아지고 막 그랬어요. 그래도 다행인 것은 저를 좋게봐주는 선수들도 있었다는 사실이에요. 그 친구들을 따로 훈련시키고 그러면서 경험도 쌓고 용기도 얻어갔죠. 그 친구들과는 지금도 연락하고 지내요. 아마도 모든 선수가 저를 무시하고 그랬다면 버티기 힘들었을거에요.

Q.2년차때 팀에 변화가 있었다고 들었어요.
맞습니다. 성적이 나쁘지 않았음에도 감독님이 사퇴하셨어요. 그 순간 가슴이 덜컹 내려앉더라고요. ‘나도 잘리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이어서 사령탑을 맡으신 분이 지금도 저의 멘토인 도니 틴들 감독님이세요. 1년차 때 저와 함께 코치를 하셨던 분이신데 감독이 되신거에요. 코치 시절에는 저랑 성향이 잘 안맞었어요. 워낙 성향이 강한 분이셔서요. 때문에 짐짓 그곳에서의 생활을 포기하고 한국 갈 준비를 하고 있었죠. 그런데 감독님께서 식사를 하자고 부르더군요. 지금도 그 자리에서 하셨던 말이 잊혀지지가 않아요. ‘너를 어시스턴트 코치로 고용하고 싶다. 준비도 잘하고 농구에 대한 지식도 많은 것 같다. 다만 한가지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 아이들 가르칠 때 두려워하는 듯한 눈빛이나 어투, 자신감 없는 행동 등 그것 고쳐야 한다. 한번이라도 보이면 그날 바로 해고할거다. 네가 그런 부분을 개선 할 수 있다면 나와 함께 일을 하고 그렇지 못하겠다면 그만 둬라’고 하셨습니다. 그동안 저를 관심 있게 쭉 지켜보셨던 거죠. 누군가 나를 진심으로 믿어준다면 그 사람은 달라질 수밖에 없어요. 그렇지않아도 변해야겠다는 생각이 가득했던 상황에서 감독님 말씀에 큰 자신감을 얻고 그 다음부터는 당차고 씩씩하게 나가게 됐어요. 아이들 장악하는 법, 미팅 때 발언 요령 등 여러 가지 부분도 새로 배웠습니다. 그러고 나니 선수들이 대하는 태도도 점점 달라지더라고요. 저 역시 더더욱 담대하고 노련해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한번은 데릭 로즈가 제가 맡고 있던 디트로이트 트레이닝캠프 파트에 와서 훈련도 했는데 예전 같으면 엄청 당황했을거에요. 살짝 긴장하기도 했지만 이내 ‘아니! 데릭 로즈고 나발이고 내가 코치인데 그냥 쳐다만 보고 있어’라는 마인드로 정신무장을 했던 기억도 납니다. 점차 팀 내 입지가 좋아지고 있던 상황에서 코로나로 인해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지만 당시의 수많은 경험은 정말 제 농구 인생의 큰 자산이라고 생각해요.

Q.마지막으로 팬들에게 인사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제가 이런 긴 인터뷰를 할만한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런저런 작은 정보도 드리고 스스로 느끼고 배워온 부분을 공유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이야기를 하게 됐습니다. 여전히 부족한 것 투성이지만 많이 공부하고 배워가면서 후배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선배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본인제공, KBL 제공
 

기사제공 점프볼

김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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