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형기 ‘낙화’
2024년 봄은 유독 배구 레전드들이 떠나가는 계절로 기억될 듯하다. 2005년 V리그 원년부터 여자부를 지켜왔던 한송이, 김해란이 은퇴를 선언한 데 이어 남자부에서도 원년부터 뛰어온 ‘기록의 사나이’가 코트를 떠난다. 통산 6623점으로 V리그 남자부 역대 최다득점 1위 기록 보유자인 왼손잡이 아포짓 스파이커 박철우(39)가 19년 간의 프로배구 선수 생활을 접는다. 자신이 물러나야 할 때를 알고 아름답게 떠나는 박철우를 지난 23~24일 춘천의 강촌 엘리시안에서 진행된 2024 KOVO 워크샵에서 만나 은퇴에 대한 소회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들어봤다.
◆ “고민하던 은퇴,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2023~2024시즌을 비롯해 최근 세 시즌 동안 박철우는 코트보다 웜업존이 더 익숙해졌다. 한국전력에는 박철우보다 네 살 아래이자 같은 왼손잡이 아포짓인 서재덕이 있다. 서재덕이 한국전력 프랜차이즈 스타인 것도 있지만, 리시브가 가능한 아포짓이라 주전은 그의 차지였다. 2023~2024시즌을 앞두고 미들 블로커로의 변신을 꾀하기도 했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박철우는 “올 시즌이 마지막이지 않을까 이미 마음이 좀 잡혀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시즌이 끝나고 구단 내부적으로 ‘고참 선수를 정리하고, 젊은 선수들 위주로 가야 되지 않느냐’라는 얘기를 전해 들었을 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구단에서 직접 내게 얘기를 하기 전까지 마치 사형을 기다리는 사형수 같은 심정이었다. 빨리 결정을 내줬으면 했는데, 다행히 빨리 얘기해주셔서 감사했다”라고 은퇴 과정을 들려줬다.
박철우는 지난 16일 개인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은퇴를 공식화하기 이전에 은퇴와 관련해 주변으로부터 많은 연락을 받았다. 그중 가장 기억나는 것은 역시 장인어른이자 스승인 신치용 전 삼성화재 감독의 연락이었다. 그는 “장인께서 처음에 연락이 와서 ‘그래도 선수를 하는 게 좋다’고 하셨다가 일주일 뒤 ‘해설도 나쁘지 않다’고 말씀하시더라. 또 일주일이 지나서 ‘이제는 은퇴를 하는 게 맞는 것 같다’고 하셨다. 그렇게 일주일씩을 기간을 두신 게 저를 위해 얼마만큼 고민을 해주셨는지가 느껴졌다. 마지막 연락 때 ‘내가 왜 은퇴하라고 했는지 알겠니’라고 물으신 뒤 ‘사위가 아니라 내가 네 감독이면 어떨까라고 생각해봤다. 아끼는 제자로 생각해보니 지금 은퇴가 맞는 것 같다’고 말씀해주셨다”라고 장인어른과의 일화도 들려줬다.
◆ 고교 졸업 후 성인배구 직행한 박철우, 곧바로 코트를 호령하다
지금이야 고교 졸업 후 프로로 직행하는 사례가 흔해졌지만, 1985년생인 박철우가 고교를 졸업하던 2004년만 해도 무조건 대학에 진학하던 시기였다. 경북사대부고를 졸업한 박철우는 역사상 두 번째로 고졸로 성인배구에 직행한 선수가 됐다. V리그 출범 직전이었던 2004년 당시 상황을 묻자 박철우는 “중3 소년체전에서 삼성화재 감독이셨던 장인어른을 처음 뵀었다. 그리고 고3 때 삼성화재에서 먼저 영입제의가 왔었는데, 현대캐피탈에서도 저를 영입하겠다고 해서 스카우트 경쟁이 붙었다. 당시만 해도 드래프트가 아니라 자유계약 때였는데, 현대캐피탈을 선택하게 됐다”라면서 “대학에 가지 않고 프로에 직행한 것을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는다. 물론 대학에서의 즐거움도 있었겠지만, 저는 오로지 좀 더 높은 리그에서 배구를 배우고 싶었다. 그리고 여담이긴 하지만, 집안 사정이 힘들었기 때문에 선택 사항이 없었다. 빨리 실업배구로 가서 집안을 일으켜야 했다”고 설명했다.
199cm의 장신이지만, 유독 말랐던 유망주였던 박철우에게 당시 현대캐피탈 사령탑을 맡고 있던 김호철 감독(現 IBK기업은행)은 많은 기회를 부여했다. 기존의 주전 아포짓이었던 후인정(前 KB손해보험 감독)에서 박철우로 토종 주포의 세대교체가 이뤄지면서 박철우는 현대캐피탈을 넘어 단숨에 V리그를 대표하는 토종 최고의 아포짓 스파이커로 성장했다. 2009~2010시즌이었던 2010년 1월30일 LIG손해보험(現 KB손해보험)전에서는 50점의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는 국내 선수로는 최초이자 여전히 아무도 해내지 못한 50점이다. 박철우는 “김호철 감독께 너무 감사하다. 저를 되게 많이 예뻐해주셨다. 많은 기회도 주시고, 코트 밖에선 장난도 많이 치면서 살갑게 대해주셨다. 내 배구 인생 은인 중 한 분”이라고 답했다.
◆ 라이벌 삼성화재로의 이적, 새로운 배구에 눈을 뜨다
그렇게 현대캐피탈을 대표하는 스타로 성장한 박철우는 2009~2010시즌을 마치고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었고, 프로배구계를 발칵 뒤집어놓는 선택을 했다. 현대캐피탈의 최대 라이벌인 삼성화재로의 이적을 선택한 것이다.
결과론이지만, 박철우의 선택은 두 팀의 역사를 크게 바꿔놓았다. 박철우의 보상선수로 현대캐피탈로 이적한 선수가 최태웅 감독이었다. 2014~2015시즌까지 현역으로 뛴 최 감독은 2015~2016시즌에 V리그 역사상 최초로 선수에서 감독으로 직행했다. 2023~2024시즌 도중 지휘봉을 내려놓을 때까지 현대캐피탈의 두 차례 챔프전 우승을 이끌었다. 최 감독이 사령탑에 오르기 전만 해도 두 팀의 관계는 라이벌이긴 하지만 삼성화재의 일방적 우위로 진행됐다면 최 감독 부임 이후엔 현대캐피탈의 우위가 계속 됐다.
박철우는 삼성화재 이적 당시를 떠올리며 “욕을 참 많이 먹긴 했죠”라고 말했다. 당시 박철우는 삼성화재 신치용 감독의 둘째 딸인 신혜인 씨와 연인 관계였고, 이는 배구판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불리기도 했다. 결국 박철우가 삼성화재로 이적한 게 이러한 관계 때문 아니냐며 현대캐피탈 팬들의 원망이 더욱 컸다. 박철우는 “그때 우승을 정말 하고 싶었다. 그래야 내가 인정을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는데, 현대캐피탈에서 뛴 마지막 시즌이었던 2009~2010시즌 챔프전에서 삼성화재를 만나 3승4패로 패했던 게 컸다. 팀은 패했지만, 제가 그때 활약이 괜찮아서 삼성화재 고위층에서 ‘박철우 무조건 영입해’라고 오더가 떨어졌다고 들었다”라고 설명했다.
2010~2011시즌부터 삼성화재로 옮긴 박철우는 숙원이었던 챔피언 반지를 2013~2014시즌ᄁᆞ지 연속 네 시즌 갖게 됐다. 다만 분업과 시스템을 중시하던 신치용 감독의 배구 아래에서 박철우 선수 개인의 기록은 손해를 본 측면이 있다. 신치용 감독의 배구에선 에이스는 외국인 선수의 몫이었고, 박철우는 보조 공격수였다.
이에 대해 박철우는 “삼성화재로 이적하고 첫 시즌에 그런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현대캐피탈 시절 세터였던 권영민 감독님(現 한국전력 감독)과 눈 감고 해도 타이밍이 맞을 정도로 호흡이 좋았다. 둘만의 전매특허 같은 공격 옵션이 세네가지가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삼성화재로 와보니 그게 안 됐다. 솔직히 미치겠더라.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예전엔 다 이겨냈던 상대들에게 당하니 부끄럽다는 생가도 들었다”면서 “리시브를 한 번도 하지 않았는데 삼성화재에서 리시브를 받는 아웃사이드 히터로도 뛰는 등 많은 고생을 했지만, 결국 우승을 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배구가 공격이 다가 아니라는 것, 기본기의 중요성, 에이스 역할을 내려놓고 팀을 위한 희생이라는 가치의 소중함 등 배구에 대한 시각을 많이 바꿀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고 설명했다.
◆ 선수 시절의 마지막 불꽃, 한국전력에서 태웠다
2019~2020시즌까지 10시즌을 삼성화재에서 뛴 박철우는 또 다시 FA 이적을 선택했다. 마지막 소속팀이 된 한국전력으로의 이적이었다. 이적 첫 해인 2020~2021시즌엔 주전 아포짓으로 뛰며 V리그 한 시즌 개인 최다득점인 596점을 올리며 이름값을 다 했지만, 2021~2022시즌부턴 박철우는 백업 선수가 됐다. 주전이 당연했던 선수에서 이제 웜업존에서 경기를 지켜보는 백업선수가 된 것이다.
미들 블로커로의 전향도 시도했지만, 쉽지 않았다. 아포짓으로 뛸 땐 현역 최고의 사이드 블로커로 이름을 높였던 박철우였지만, 상대 세터와의 수싸움과 가운데 속공도 견제한 뒤 사이드 공격까지 막아내야 하는 미들 블로커는 완전히 새로운 영역이었다. 팀을 위해 묵묵히 미들 블로커로 준비를 했던 박철우였지만, 2023~2024시즌 첫 경기에서 아포짓 백업으로 출전했다. 아포짓과 미들 블로커를 오가면서 박철우는 두 포지션의 후배들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그는 “두 포지션에 어정쩡하게 있다보니 젊은 아포짓 후배들은 물론 미들 블로커 후배들에게도 미안하더라. 그래서 권 감독님께 아포짓으로만 뛰겠다고 말씀드렸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주전이 익숙했던 박철우에게 백업으로 뛰는 3시즌은 자신을 깎는 과정이 됐다. 그는 “어떻게 보면 주전으로만 뛰던 제가 거만하거나 오만했던 부분이 있었을 수 있다. 백업 선수들을 이해한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그 위치에 가보니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이 너무 많았다. 제 자신을 상처를 내면서도 깎아내는 과정을 통해 다져졌다. 그러면서 제 미래에 대한 구상도 많이 하게 됐다. 웜업존에 있는 선수들은 물론 경기장에 함께 오지 못하는 선수들의 마음도 이해하게 됐다”면서 “나중에 지도자가 된다면 백업으로 뛴 3시즌이 큰 자산이 될 것 같다. 주전과 백업을 모두 만족시킬 수는 없겠지만, 가장 이상적이고 합리적인 운영은 무엇일까를 고민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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