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C 구단 최형길 단장(묘소앞 앞줄)과 강양택 코치, 전창진 감독, 이상민, 신명호 코치(뒷줄 오른쪽부터)가 고 정상영 명예회장의 묘소를 참배하고 있다. 사진제공=KCC 구단
정상영 명예회장의 묘소에 바쳐진 KCC의 챔피언 트로피. 사진제공=KCC 구단
[스포츠조선 최만식 기자] "늦어서 죄송합니다."
챔피언의 기쁨을 잠시 덮었다. 남자프로농구 2023~2024시즌 챔피언결정전에서 우승한 KCC 구단은 휴식 후 첫 공식일정을 숙연하게 시작했다. 최형길 단장, 전창진 감독을 비롯한 선수단은 8일 고(故) 정상영 KCC 명예회장의 묘소를 찾았다. 고인은 2021년 1월 30일 향년 84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막내 동생인 고인은 1958년 '금강스레트공업주식회사'를 시작으로 60여년 경영 일선에 몸담으며 KCC를 글로벌 첨단소재 화학업계의 대표 중견그룹으로 키웠다.
고인의 생전 농구사랑은 농구계에서 유명했다. 한국농구연맹(KBL)이 정규리그 타이틀 스폰서를 구하지 못하자 총 5차례에 걸쳐 후원했고 프로-아마 최강전, 아시아-퍼시픽 대학농구챌린지 등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각급 국가대표팀이 훈련장을 구하지 못할 때에는 KCC 클럽하우스 체육관을 선뜻 내놓는 전통 역시 고인의 배려에서 시작됐다.
KCC가 투자를 아끼지 않는 대표적인 '리딩구단'으로 자리매김한 것도 고 정 명예회장의 전폭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고인이 떠난 뒤에도 농구사랑은 '대물림'됐고, 이번 시즌 역사적인 '신화(사상 첫 정규 5위팀의 챔피언 등극)' 결실로 이어졌다.
정상영 명예회장의 묘소를 참배하기 위해 도열한 KCC 선수들. 사진제공=KCC 구단
고인이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만져보고 싶었다는 챔피언 트로피를 이제서야 영전에 바치게 됐다. 이날 참배에서 유독 남다른 감회에 빠져든 이가 있다. 전창진 감독이다. 온갖 우여곡절 끝에 챔피언에 등극했을 때도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던 그가 고인의 묘소 앞에서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고인과 생전에 했던 약속을 뒤늦게나마 지키게 됐으니 회한과 감사함이 교차했던 모양이다. 때마침 어버이날. 전 감독에게는 아버지같을 뿐 아니라 농구 인생의 구원자였던 정 전 명예회장이다. 2018년말 전 감독이 KCC의 기술고문으로 3년여 만에 농구판에 복귀할 때 손을 내밀어 준 이가 고인이었다. 당시 전 감독은 주변의 편견에 '주홍글씨'가 찍힌 바람에 은둔 생활을 했다. 스포츠 도박 혐의는 2016년 9월에 이미 무혐의로 기소조차 되지 않았고, 단순 도박 혐의도 무죄 판결을 받은 상태였다. 하지만 대부분 유명인 관련 사건이 그렇듯, 나중에 입증된 결백에는 무관심했기에 '주홍글씨'는 여전했다. 그랬던 전 감독에게 고인은 직접 전화를 걸어 호통같은 위로를 했다. "억울한 누명도 다 벗었는데 언제까지 그렇게 숨어살려고 하느냐. 너를 나쁜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이 잘못이지 죄없는 네가 왜 자꾸 숨냐. 떳떳하게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라."
정상영 KCC 명예회장이 2004년 KCC가 챔피언결정전 우승했을 당시 선수단의 헹가래를 받고 있다. 연합뉴스
전창진 KCC 감독이 김희옥 KBL 총재로부터 2023~2024시즌 챔피언 시상을 받고 있다. 사진제공=KBL
이후 전 감독은 기술고문으로 복귀했고, 2019~2020시즌부터 KCC의 새로운 감독으로 '양지'에 섰다. 전 감독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을 때 구원의 손으로 일으켜세워 준 고인이었다. 전 감독은 사령탑으로 복귀한 뒤에도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는 그분께 보답하는 길은 우승컵을 안겨드리는 것밖에 없다. 내가 KCC에 몸담는 동안에는 그 약속을 꼭 지키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런데 감독 복귀 후 첫 정규리그 우승(2020~2021시즌)을 앞두고 있던 2021년 1월, 정 명예회장은 별안간 세상을 떠났다. 전 감독은 당시 통곡했다. "다음엔 챔피언 트로피를 들고 찾아뵙겠다"고 다짐했던 전 감독은 3년 만에 약속을 지켰지만 '너무 늦은 것 같다'는 죄송한 마음에 또 고개를 숙였다.
전 감독은 "명예회장님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이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였는데 체육관에 오시면 방역 상태를 먼저 점검하고 선수들 건강을 걱정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면서 "오늘 트로피를 하늘에서 받으신 회장님이 살아계셨더라면 '그래 너는 (우승)할 줄 알았어. 수고했어'라고 격려해주셨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날 고인의 묘소에 바쳐진 우승컵에는 회한의 눈물이 담겼다.
최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