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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석의 그라운드] 28년 격차 안세영의 길, 방수현의 길. “아직 황금기는 오지 않았다

조아라유 0

 

 
 
2024 파리올림픽 배드민턴 여자 단식 금메달을 딴 뒤 시상식에서 셀피를 찍고 있는 안세영(대한배드민턴협회 제공)
 

 

안세영(22·삼성생명)이 2024 파리올림픽 배드민턴 여자 단식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면서 새삼 소환된 인물이 있습니다. 1996 애틀랜타올림픽 배드민턴 여자 단식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방수현(52)입니다. 안세영은 바로 방수현 이후 28년 만에 같은 종목에서 올림픽을 제패했습니다.

한국은 배드민턴 강국으로 불리지만 국제무대에서 복식 종목에서는 빛나는 성적을 냈지만 단식은 남녀를 통틀어 중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인도, 스웨덴 등의 높은 벽에 막혀 고전했던 게 현실입니다. 배드민턴이 올림픽에 처음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 이후 단식 금메달은 안세영과 방수현뿐입니다. 그나마 남자 단식에서 올림픽 최고 성적은 2004년 아테네 대회 때 나온 손승모의 은메달입니다. 단식은 체력 소모가 심하고 부상도 잦기에 선수 저변이 넓지 않으면 좋은 성적을 기대하기 힘들죠. 그래서 방수현이나 안세영의 금메달은 더욱 값지게만 보입니다.

하지만 안세영이 올림픽 결승전 승리 직후 돌출 발언으로 금메달의 짜릿한 쾌감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안세영 측과 대한배드민턴협회, 대표팀 코칭스태프와 동료 선수들이 마치 진실게임을 하듯 날 선 공방전을 펼치고 있습니다.


 


2024 파리올림픽 배드민턴 여자 단식 금메달리스트 안세영의 플레이 모습(대한배드민턴협회 제공)

 



안세영의 주장을 요약하면 부상 치료를 제대로 못 받았으며, 대표팀 훈련 시스템도 정상적이지 못했고, 개인 트레이너 동행도 불가능했다는 둥 그간의 설움을 토로했습니다. 그러면서 앞으로 대표팀을 떠나 개인 자격으로 국제대회에 나가고 싶다는 요구를 하기도 했죠. 개인 자격으로 활동하겠다는 건 개인적으로 용품 등 후원 계약을 하겠다는 의미로도 풀이됐습니다. 현재 배드민턴 대표팀은 대한배드민턴협회 공식 후원사의 의류, 신발, 라켓 등 용품 일체를 써야 합니다. 그 대가로 이 용품사는 연간 20억 원 이상의 현금을 지원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협회의 1년 예산은 170억 원 정도. 용품사의 지원을 통해 어린 주니어 선수를 육성하고 대표팀 해외 출전 경비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서울 도심의 한 대형 호텔 외면 광고판에 등장한 안세영(김종석 제공)

 



안세영은 지난해 항저우 아시안게임 우승 전후로 글로벌 용품업체의 러브콜이 쏟아졌다고 합니다. 실제로 파리올림픽 개막에 맞춰 서울 도심 대형빌딩에는 배드민턴협회 공식 후원사가 아닌 다른 브랜드의 의류를 입은 안세영 대형 광고가 내걸렸습니다. 지난해에는 안세영이 다른 용품업체의 신발 착용을 요구했다는 얘기도 들립니다.

만약 안세영이 협회 공식 후원사가 아닌 다른 업체와 개별 계약을 할 경우 배드민턴협회는 현재와 같은 거액의 후원금을 기대하기 힘듭니다. 협회 후원을 통한 브랜드 이미지 제고, 매출 증대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죠. 이러한 현실은 재정자립도가 극히 낮은 국내 대부분 경기단체가 마찬가지입니다. 

배드민턴 전설 박주봉 감독이 이끄는 일본 대표팀은 선수들에게 라켓, 신발은 개별적으로 계약할수록 허용하고 있습니다. 대신 일본배드민턴협회가 용품사에서 제공받는 후원 금액은 상당히 적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일본배드민턴협회장도 협회에 내놓는 출연금은 없으며 정부 지원이나 마케팅 활동 등으로 대표팀 운영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2023시즌 배드민턴 상금 랭킹. 안세영이 남녀를 통틀어 1위에 올랐다(BWF 홈페이지 캡처)

 



결국 안세영 입장에서는 자신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국제배드민턴연맹(BWF)에 따르면 안세영은 지난 시즌 7개 대회에서 우승하며 남녀를 통틀어 최다 상금 1위에 올랐습니다. 상금 액수는 42만8480 달러(약 5억 8,000만 원)에 이릅니다. 대회 상금에 천문학적인 개별 후원 금액과 CF 촬영 등이 쌓인다면 수십억 원대 돈방석에 앉을 수 있다는 계산도 나옵니다. 

하지만 안세영 역시 주니어 시절부터 협회의 각별한 지원을 통해 성장할 수 있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오랜 합숙훈련과 해외 원정이 10대 안세영에게는 본인 표현대로 분노의 시간이 될 수도 있겠지만 성장의 자양분이 된 것도 맞습니다. 일본 배드민턴이 세계 최강의 전력을 갖추게 된 데는 박주봉 감독 부임 후 한국식 합숙 훈련 등을 도입한 영향도 있습니다. 

안세영은 방수현과 함께 한국 배드민턴 역사에서 몇십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월드 스타입니다. 그만큼 특별대우도 불가피해 보입니다. 이런 사달이 나기 전에 배드민턴협회나 소속사인 삼성생명이 넉넉한 인센티브를 보장하고 어느 정도 자율성을 인정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큽니다. 소속팀 삼성생명도 경사를 맞은 줄 알았다가 폭탄이 터진 분위기가 됐다는 후문입니다. 삼성생명은 1995년 창단한 삼성전기 배드민턴팀을 인수해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국내 실업 배드민턴의 명문 구단이죠.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혼합복식 금메달리스트인 길영아 삼성생명 감독은 이번에 아들 김원호가 혼합복식 은메달을 따면서 사상 첫 모자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됐지만 안타까움과 함께 마냥 좋을 수만 없다고 하더군요. 


 


  방수현은 지난해 진천선수촌을 방문해 안세영 등 대표선수들을 격려하며 식사 자리를 마련하기도 했다(방수현 제공)

 



안세영 역시 불쑥 격정을 토로하기보다는 천 리 길도 한걸음부터라고 수십 년간 이어온 한국 배드민턴의 관행을 개선하는 데 서서히 속도를 올렸으면 어땠을까요. 그랬다면 적어도 올림픽 혼합복식에서 값진 은메달을 딴 대표팀 선배들과 오랜 세월 동고동락한 감독, 코치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일은 없었을 것 같습니다. 방수현은 2023년 5월 진천선수촌을 방문해 배드민턴 대표팀 후배들을 격려해 준 일이 있습니다. 당시 대표팀 김학균 감독이 안세영에게 좋은 기운을 넣어달라고 해서 성사된 자리였습니다. 김학균 감독은 오랜 세월 주니어 지도자 경험을 쌓았기에 성인 대표팀을 맡아서도 어릴 적 특성과 성격에 맞춘 지도력을 발휘해 성과를 봤다는 평가입니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을 마친 뒤 청와대를 예방한 배드민턴 단식 금메달리스트 방수현

 



방수현 얘기로 돌아가 볼까 합니다. 1996 애틀랜타올림픽에서 여자 단식 금메달을 딴 뒤 귀국한 방수현은 올림픽 대표 선수단과 청와대를 예방해 당시 김영삼 대통령 내외와 삼계탕 점심을 나눴습니다. 칼국수로 유명했던 대통령이었지만 당시 보도를 보면 특식으로 삼계탕이 나왔다더군요.

대통령 바로 옆자리에 앉았던 방수현은 대통령에게 배드민턴 전용 경기장이 없어 어려움이 많다는 사연을 전달했습니다. 배드민턴 대표팀은 전용 코트 없이 뜨내기 신세로 지내야 했죠. 이에 대통령은 이 행사에 배석한 김운용 대한체육회장에게 전용 경기장 신축을 지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방수현의 한마디로 태릉선수촌에는 2000년 시드니올림픽을 앞두고 배드민턴 코트 13개를 갖춘 전용훈련장이 탄생해 한국 셔틀콕의 요람이 됐습니다.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안세영. BWF 인스타그램

 



BWF 홈페이지에는 올림픽에 나선 안세영의 소감이 나옵니다.
“저는 항상 큰 꿈을 꾸려고 노력하고, 항상 그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그렇게 훈련하고, 그렇게 코트에 나가 최선을 다합니다. 아마도 그래서 비교적 어린 나이에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아직 황금기가 오지 않은 건 아직 젊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직 더 많은 경험을 쌓을 것이고, 여전히 여러분에게 더 나은 경기를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방수현이 애틀랜타올림픽 정상에 선 나이는 24세였습니다. 안세영은 이제 22세입니다. 자신의 표현대로 아직 황금기는 오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찬란한 미래를 위해 감정은 내려놓고 모두 한발 물러나 해법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 암튼 지금은 싸울 때가 아니라 즐길 때 아닐까요.


김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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