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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안가고 연세대 가려고 끝까지 싸웠습니다”

주간관리자 0

[김종수의 농구人터뷰(38)] 코트의 국회의원 '기호 0번' 박종천

 



‘파란만장(波瀾萬丈)’…, 농구인 박종천(62‧194cm)의 농구 인생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말이다. 쭉 올라갔다 싶다가도 급격하게 추락했고, 다시 올라가려던 길에는 장애물이 가득했다. 둥글둥글, 평탄 등의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는 굴곡진 길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런 시련이 이미 익숙하다는 듯 넘어지면 툭툭 털고 일어나고, 길을 잘못 들었다 싶으면 유하게 돌아가는 법도 알게 됐다. 아니다 싶을 때는 특유의 뚝심으로 정면돌파했다. 결과는 그 다음 문제였다.

“허허헛…, 솔직히 파란만장이라는 표현은 조금 민망합니다. 저뿐 아니라 선수, 지도자로 오랜시간 농구판에서 롱런한 분들은 하나같이 영화같은 스토리를 가지고 있을겁니다. 경쟁으로 가득한 이 바닥에서 생존했다는 것 자체가 평범하지 않았다는 증명 중 하나니까요. 풍운(風雲), 말 그대로 바람과 구름이 가득한 곳이 코트라는 전쟁터입니다”

박종천의 선수 생활은 짧고 굵었다. 다소 늦은 고등학교 시절 농구를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 지나지않아 전국구 센터로 명성을 떨쳤고 이를 입증하듯 농구 명문 연세대에 들어가서도 팀내 중심 빅맨으로서 맹활약했다. 당연스레 실업팀들의 폭팔적 관심을 받게 됐고 치열한 스카우트 전쟁 끝에 현대전자에 들어간다.

기복이 적고 꾸준한 경기력이 강점인 선수답게 박종천은 자신이 가는 곳마다 좋은 활약을 펼쳤다. 현대전자의 농구대잔치 3회 우승에 기여한 것을 비롯 1982년 뉴델리 아시안 게임에서 는 한국 남자 농구가 중국을 누르고 사상 첫 금메달을 목에 거는데 공헌했다. 20대 한창 때임을 감안했을 때 선수 박종천의 농구 인생은 탄탄대로처럼 보였다. 아쉽게도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은 부상이었다. 무릎부상이 점차 악화되면서 결국 28세에 은퇴하고 만다. 지금보다 은퇴시기가 빠른 시절임을 감안해도 다소 이른 것은 분명했다.

이후 적지않은 시간동안 지도자 생활을 했던 농구인 박종천의 농구 인생은 여자농구와 남자농구에서 평가가 서로 엇갈린다. 여자농구계에서는 어느 정도 능력을 인정받은 것을 비롯 재미있고 유쾌한 지도자로 이름을 알렸다. 거기에 더해 여유있고 재치넘치는 화법, 카메라 정면을 응시하는 시선 처리 등 특유의 인터뷰 스킬을 보여주며 ‘코트의 국회의원’, ‘기호 0번 박종천’ 등의 별명으로 불렸다.

반면 남자농구 쪽에서는 여자농구 때보다 성적도 안좋았으며 구설수도 많았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성공이라는 단어 뒤에는 운도 상당 부분 작용하고 그때 그때 맞는 자리가 따로 있는 듯 싶어요. 똑같은 저인데도 상황마다 평가가 달라졌거든요. 저는 늘 똑같았습니다. 인생이 그래서 재미있는거죠" 당시를 회상하는 박종천의 말에서는 아쉬움과 후련함이 함께 느껴졌다.


 

 



“코로나는 힘들었지만 중국생활은 나름 즐거웠습니다”

Q.요새 어떻게 지내세요?

가족하고 떨어져있던 시간이 길어서 요새는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중국 우한의 후베이성 청소년 농구대표팀 감독을 맡고 있다가 한국으로 돌아온지 얼마 안됐거든요. 본래는 가족들도 중국에 오고, 저도 종종 한국을 왔다갔다 하려고 했었는데 코로나 사태가 터지면서 한동안 발이 묶여버렸죠. 감독으로서 4년계약을 마무리 지은 후 후베이성 여자프로팀에 파견근무좀 나가달라고해서 그것까지 마치고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Q.중국에 한국 지도자들이 여럿 있는 것 같아요.
그렇죠. 당장 제가 알고 있는 사람만해도 박명수 감독, 김용식 감독, 황문용 감독 등이 있고 강정수 감독도 일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외 제가 모르는 분들도 있을 수 있고요. 중국 현지에서 한국 지도자들이 인기가 좋아요. 섬세함과 성실함을 함께 갖추고 있는지라 중국 구단이 원하는 바를 잘 채워주는 듯 싶어요. 처음에 자리잡는데 조금 어려워서 그렇지 어느 정도 인정만 받으면 지도자 생활하기에 나쁘지 않은 곳이 중국입니다. 각나라별로 민족성같은게 있잖아요. 제가 느낀 중국은 장삿꾼 마인드라고 할까요. 왕서방 있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의심이 많아서 처음에는 이래저래 힘든 부분도 있지만 본인들이 느끼기에 잘한다 싶으면 그때부터는 믿어주고 밀어줘요. 한번 연을 맺었다싶으면 오래가는 편이죠. 단 투자한 만큼의 효과가 나타난다는 전제하에서요. 그만큼의 성과가 없다고 판단되면 여지없어요. 맺고 끊는게 확실하죠.

Q.중국에서 외롭지는 않으셨어요?
애당초 마음을 내려놓는 등 일정 부분 각오를 하고 갔으니까요. 제가 중학교 때부터 중국 역사에 관심도 많고해서 생각보다 적응은 빨리됐습니다. 초반에는 아내랑 함께 중국 관광지 등을 돌아다니고 그랬던지라 즐거운 추억도 많이 쌓았고요. 하지만 문제는 코로나였죠. 워낙 인구가 많아서 전염병같은게 퍼지면 장난아니잖아요. 그래서인지 방역에 대해서 매우 엄격해요. 수시로 테스트를 하는데 한번이라도 걸렸다싶으면 얄짤없어요. 즉시 격리는 물론이거니와 지역 폐쇄도 서슴치않아요. 그러다보니 코로나가 터진 이후에는 나라 전체에 긴장감이 돌아요. 자연스레 저역시 그런 분위기 속에서 일을 할 수밖에 없었고요.

Q.가족 관계는 어떻게 되시며 혹시 자녀들도 운동을 했나요?
와이프 그리고 아들, 딸 그렇게 있습니다. 운동같은 경우는 아무래도 제가 체육인이니까 그런 환경과 맞물려 아들도 잠깐 운동을 했지만 큰 열정은 없어보여서 오래 안하고 그만두게 했습니다. 운동말고 다른 방향이 없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정말 좋아서 하지 않는 이상 대성하기 힘든 길이잖아요. 용산중학교까지는 보내봤지만 거기까지만 했습니다. 제 때까지만해도 대다수 운동선수 출신 부모들은 자식이 그길로 가는 것을 별로 선호하지 않았어요. 워낙 힘들게 운동을 했던 기억이 많은지라 권하고 싶지않았던거죠. 그래서 2세 출신 유명한 선수가 많이 안나오기도 했고요. 그나마 김영기 전 KBL 총재의 아들 김상식 정도?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죠. 예전보다 환경, 시스템적인 부분에서 비교도 안되게 발달했고 무엇보다 돈도 많이 받고요.(웃음) 그래서 자질이 있다싶으면 부모들이 적극적으로 시키는 것 같더라고요. 최진수, 허웅, 허훈, 김진영, 박지수, 양재민, 정호영, 이원석, 이현중, 여준석 등 많잖아요.








“농구를 시작하게된 계기요? 생계였죠”

Q.농구는 어떤 계기로 시작하시게 된 것인가요?

그게 좀 길어요(웃음). 일단 제가 살아온 배경부터 말씀드려야될 것 같아요. 제가 전남 여수 출신인데요. 거기서도 많이 시골 쪽이었어요. 이런 말하면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동네에서 물물교환이 여전히 성행했고 전기도 1978년도인가 그때 들어왔을 정도로 완전 깡촌이었죠. 초등학교만 나오고 바로 사회생활에 들어간 케이스도 부지기수였어요. 저희 큰형님도 그랬으니까요. 일명 뺑뺑이라고 하죠. 제가 초등학교 졸업할때 쯤 그게 실시되어서 아슬아슬하게 중학교에 가게됐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저도 초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직업 전선에 뛰어들었을지도 모를 일이죠. 어쨌거나 시내에 있는 중학교를 다니게 됐는데 수업료가 당시 7천 몇백원 했을거에요. 저희집 형편에 비춰봤을 때 결코 만만한 액수도 아니었고요. 버스도 하루에 3번 정도밖에 안다니는지라 자취를 하게됐어요. 일단 한푼이라도 보태야 되는 입장인지라 신문 배달을 시작했죠. 그러다보니 이런저런 신문을 많이 보게 됐는데 특히 눈에 들어온 것은 각종 소년신문이었어요. 거기서 스포츠 스타들의 얘기를 읽으면서 막연하게 ‘나도 이런 사람들처럼 되고싶다’는 꿈을 꾸곤했습니다. 거기에 신동파, 고 김영일, 유희영, 이인표, 김인건 등 이런 분들이 해외에서 경기를 하면 이광재 아나운서의 목소리로 라디오 중계가 이뤄졌는데요.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기뻐해주십시오’ 이런 멘트로 유명한 분이죠. 그때 당시 그것을 듣는 순간 대한민국 모든 아이들의 가슴이 불이 당겨지며 애국자가 되고는 했었죠. 저도 그중 한명이었고요. 그렇게 중계를 듣고 들뜬 마음으로 운동장에 가서 낡은 고무공으로 한번씩 농구골대에 슛을 던져본 것이 농구와의 첫 만남이었죠.

Q.거기서 감명을 받아서 농구 선수를 꿈꾸셨군요?
아뇨. 현실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어요. 당장 생계가 걱정되는 삶을 살고 있는데 막연한 꿈에 젖어서 살수는 없는 노릇이었죠. 중학교 졸업 이후에 시험을 봐서 순천공고 자동차과를 들어갔어요.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려면 기술을 배우는 쪽이 낫겠다 싶었죠. 하지만 역시나 학비가 문제더라고요. 중학교때처럼 신문배달만 해서는 감당이 안됐어요. 이러저리 고심 끝에 찾아보니까 축구부에서 선수로 뛰면 장학금이 나온다고 하더라고요. 이거다 싶었어요. 체육 선생님을 찾아가 사정을 말씀드리고 축구부에 들어가고 싶다고 했죠. 어찌보면 황당했을거에요. 당시 축구부는 이전부터 꾸준하게 선수로 뛰어온 학생들 위주로 뽑거든요. 저같은 일반 학생은 들어가기 어려운 곳이었어요. 다행히 신체조건도 좋고 운동신경도 나쁘지 않아서 골키퍼를 맡을 수 있었고 장학금도 받게됐어요. 하지만 1년 정도 해보니까 이건 나의 길이 아니다싶어서 그만두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더불어 운동에 많은 시간을 빼앗기니 공부할 시간도 부족했고요. 어쨌거나 당시 1차적인 목표는 빨리 직업 전선에 뛰어들어 돈을 버는 것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체육 선생님께서는 그대로 운동을 그만두게 하기에는 뭔가 아쉽다고 느끼셨나봐요. ‘축구가 안맞으면 농구는 어떠냐?’고 권하시더라고요.

Q.아 드디어 농구의 길로 가게 된 것인가요?
일단 솔깃했죠.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이 문제였습니다. 당시 운동에 대한 인식은 그리 좋지 않은 편이었어요. ‘운동으로 성공하지 못하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깡패나 되는 것 아니냐’는 말도 많았죠. 부모님께서도 불확실한 운동보다는 안정적으로 살길 바래셨어요. 안되겠다 싶어서 큰형님한테 도움을 요청했죠. 큰형님께서는 초등학교 밖에 안나오고 당시 남원 운봉 양조장에서 머슴생활을 하면서 새경을 받고있었지만 그래도 생각이 진보적이셨어요. ‘너가 그렇게 원하면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며 대신 부모님을 설득해주시더라고요. 그래서 허락을 받고 선생님께 추천서를 받아서 광주진흥고로 갔어요. 야구로 유명한 학교지만 그때는 농구부가 있었어요.

Q.광주진흥고요? 서울체고 졸업하지 않았나요?
시작은 진흥고에서 했죠. 문제는 제가 이곳에서 농구를 1년 정도했는데 그 기간동안 농구로 대학을 진학한 선배가 한명도 없었다는 사실이에요. 예비고사를 면제받으려면 최소 전국대회에서 3위 안에 입상하던지 아니면 하다못해 감투상 등 무슨 수상경력이라도 있어야 했는데 그게 안됐던거죠. 그래서 농구부가 무슨 의미가 있냐는 말이 계속 나왔고 결국 학교 측에서 해체를 시켜버렸어요. 저를 비롯한 동료들은 삽시간에 공중에 붕뜨게 되고 말았습니다. 다행인 것은 저희 농구부 멤버들 중 상당수를 좋게 봐주신 외부 관계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이죠. 나중에 알게됐지만 경복고, 양정고 등지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꽤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저같은 경우는 정말 걱정이 많았거든요. 제가 고집해서 농구부에 들어갔고 이제막 기본기를 배우고있는 초보인데 어찌해야되나 앞이 캄캄했습니다. 다행히 서울체고에서 숙식 해결해주고 장학금도 주는 조건으로 스카우트 제의가 왔는데, 아우…, 당시 제 입장에서는 완전 구세주였죠. 저를 포함해서 총 7명이 갔습니다.


 

 



Q.늦게 시작한 농구라서 더욱 열심히 했을 것 같아요.
그렇죠. 제 딴에는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당시 서울체고 시스템이 5교시까지는 일반 학생들과 똑같이 수업을 해요. 그리고 6교시부터 운동을 하는데 공부와 운동을 병행한다는 점에서는 좋은 시스템이었죠. 저도 그런 방식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문제는 저의 기량이었죠. 초보나 다름없는 저를 스카우트한 것은 가능성을 보고 한 것이잖아요. 발전이 없으면 더 이상 쳐다보지않을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짬짬이 시간을 내서 개인운동을 했습니다. 다른 학교도 마찬가지였을까 싶지만 서울체고 운동부는 규율이 엄격했어요. 말이 기숙사지 군대나 마찬가지였어요. 새벽 5시 50분에 일어나서 점호하고 운동장 뛰면서 하루 시작하고 학교 공부 마치고 운동하고 이후에 다시 청소하고 점호하고 완전 통제된 생활의 연속이었어요. 저같은 경우 운동을 늦게 시작해서 기본기가 너무 부족했어요. 그래서 사감 선생님 허락하에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야외코트로 가서 1시간 정도 개인 연습을 한 후 아침점호에 참석했습니다. 그렇게라도 안하면 도저히 따라갈 수 없겠더라고요. 큰형님께서 부모님을 대신 설득해주신 끝에 겨우겨우 시작한 농구인데 선수도 못되어보고 끝나면 낭패도 이런 낭패가 어디있겠습니까.

“서울대 안가고 연세대가려고 끝까지 싸우고 또 싸웠습니다”

Q.센터를 보셨다는데 어떤 스타일이었을까요?

스타일이랄 것이나 있나요. 그때는 기본기 자체가 워낙 부족해서 살아남는 것이 우선이었어요. 다들 저보다 농구를 많이한 동료들이잖아요. 그래도 열심히 한 끝에 고2때 처음 주전으로 나간 대회에서 주목을 받았고 조금씩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 구력이 짧아서 드리블도 투박했고 섬세한 플레이는 찾아보기 힘들었을거에요. 그냥 악으로 깡으로 몸싸움하고 리바운드하고, 블록슛하고 본연의 플레이에 충실하려했고…, 더불어 딱 하나 잘하는 저의 특기가 있었는데 그걸로 좀 시선을 끈 것 같아요. 턴어라운드 슛이에요. 저도 남들처럼 돋보이는게 하나 정도는 있어야 될 것 같아서 정말 열심히 연습했습니다.

Q.당시 많이 안했던 기술이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아시고 연습하셨나요?
서울오니까 좋은 점이 가끔 위성방송 등을 통해 AFKN에서 NBA중계 등을 볼 수 있었다는 점이에요. 시내에 나오면 전자대리점 같은 곳에서 외부로 텔레비전을 돌려놓잖아요. 운좋게 지나가는 시간대에 방송을 하면 끝날 때까지 서서 보고 갔던 기억이 나요. 당시 매직 존슨, 카림 압둘자바, 래리 버드같은 선수들의 플레이를 보면서 ‘와’하고 그저 감탄했죠. 멋진 기술이다싶으면 비슷하게 따라해보려고 시도도 했고요. 당시 농구는 정말 단순했어요. 주로 개인기보다는 팀플레이에 의해서 득점을 올리는 경향이 강했는데 그마저도 ‘드라이브 인하다가 막히면 패스해서 슛’ 등 전술이 워낙 단순했던지라 지금의 시선으로보면 정말 특별할게 하나도 없었어요.

Q.당시 서울체고에서 많이 가던 대학으로는 어디가 있었을까요?
일단 당시 저희팀이 전국대회에서 준우승도 하는 등 성적이 잘 나왔던지라 각 대학교에서도 눈독을 받게됐어요. 그중에서도 많은 선배들이 가던 곳은 서울대학교였어요. 지금처럼 프로가 있던 시절이 아니잖아요. 농구의 길을 가는 것도, 농구선수를 하려는 것도 직장 개념이었어요. 그때는 지금처럼 임용고시를 거치지않고 대학교에서 교육학과만 나와도 바로 교사가 가능했던 시절입니다. 서울대 교육학과 얼마나 타이틀 좋아요. 때문에 학교 자체적으로도, 학생들 스스로도 서울대를 선호하는 분위기였어요. 실제로 당시 선후배 동기들 대다수가 교사 혹은 교수의 길을 갔습니다.


 






Q.하지만 서울대를 가지않으셨어요.
그렇죠. 막 농구를 시작했을 때 같았으면 서울대가서 교사 자격증 따는 정도로 만족했을지 모르겠지만 농구에 재미를 붙이게 된 순간에는 달랐습니다.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죠. ‘농구로 성공하고 인정받아서 태극마크를 달아보자’이런 목표를 가지고 꿈을 키워나갔어요. 지금이야 국가대표에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선수도 많지만 당시에는 달랐습니다. 구태여 성인대표팀이 아니라고해도 청소년대표 등 어떤 대표라도 해서 가슴에 태극기를 달게되는 자체가 큰 영광이었죠. 대세는 연세대와 고려대였습니다. 저에게 필요했던 것은 학벌이 아니라 농구를 더 잘할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어쨌거나 늦게 시작한 농구지만 나름 인정을 받아서 고3 졸업반 시즌에는 전국 랭킹 1위 평가도 받았고 각 대학교에서 스카우트 전쟁의 조짐이 보였습니다. 학교는 물론 시골에 있는 큰형님한테까지 연락이 갔다고 하더라고요.

Q.스카우트 전쟁이라고하면 어느 정도였나요?
사실 그때는 많이 체감하지는 못했어요. 안팎으로 시끄럽다는 정도만 느낄 뿐이었죠. 여러 가지 조건이 저에게 직접 오기보다는 학교로, 집으로 많이 왔으니까요.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A대학과 B대학같은 경우 수천만원을 스카우트 비용으로 큰형님에게 제시했다고 하더라고요. 당시 가난했던 저희 집 상황에서 그 돈이면 시골에 있는 땅이나 논 수천평을 살 수 있는 금액이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형님은 저에게 판단을 맡긴 채 모른척 나서지 않으셨죠. 오히려 문제는 학교였어요. 당시 서울체고 선생님의 80%가량이 서울대 출신이었어요. 서울대 쪽에서는 농구부를 만들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만약 제가 온다면 서울체고 농구부 졸업반 전부를 받아준다는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그야말로 파격적이었죠. 학교측에서는 당연스레 저를 서울대로 보내야 되는 입장이었을테고요.

Q.난처하셨을 것 같아요.
많이 난처했죠. 제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다른 동기들 운명까지 결정되니까요. 하지만 마음을 독하게 먹었습니다. 저도 힘든 농구를 하면서 키워온 꿈이 있잖아요. 단순히 상황이 이래서라며 원치않는 선택을 한다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학교에다가 못을 박았죠. ‘저는 서울대를 가지않겠습니다. 연세대 아니면 고려대를 갈겁니다’라고요. 2학년때인가 병원에 간다고하고 외출증을 끊어서 장충체육관으로 연고전을 보러간 적이 있어요. 그때의 열기와 함성…, 우와, 그냥 홀딱 빠져버렸죠. 그뒤에는 무조건 두팀 중에 하나로 가겠다고 마음먹었죠. 어쨌거나 저는 그일로 서울체고 측에서 제적까지 당해버렸어요. 끝까지 고집을 부린 대가죠.


 

 



Q.최종적으로 연세대를 택하셨어요.
연세대와 고려대를 두고 갈등을 했어요. 하지만 그냥 연세대가 좋았어요. 마음이 기울더라고요. 그런데 살짝 서운했던 것은 다른 학교는 다 적극적으로 스카우트 의향을 비쳤는데 연세대만 소극적이었어요. 저는 연세대로 마음을 정했는데요. 당시 스카우트 비용 등이 없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저한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거든요. 어찌보면 ‘모양 빠지는 행보’였지만 그래도 연세대로 가야겠더라고요. 그래서 신촌 로터리 인근 빵집으로가서 당시 연세대 4학년이던 신선우 선배를 만났어요. ‘연세대로 가겠습니다’하니까 깜짝 놀라시더라고요.

Q.다른 학교에서 가만히 안있었을 것같아요.
맞습니다. 고려대를 비롯해서 A대학과 B대학 스카우터들이 정문 앞에서 진치고 있고, 학교에서는 무조건 서울대를 가라고 성화였죠.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신)선우형에게 도움을 요청했어요. 선우형이 숙소로 몰래왔고 함께 뒷문 담벼락을 넘어서 도망가버렸어요. 그리고 연세대 교수님 집에 몰래 숨어있었죠. 그렇게 갑자기 사라져버리니까 난리가 났습니다. 그때는 학교 밖으로 나가려면 외출증을 끊어야했거든요. 서울체고 측에서 ‘일주일 안에 안오면 제적처리한다’고 통보했고 어쩔 수 없이 돌아갔죠. 그랬더니 어떤 방에다가 한달 가까이 감금하다시피했어요. 그리고는 하루에도 몇 번씩 수업을 마친 선생님들이 돌아가면서 들어오셔서 ‘서울대 가야한다’고 다양한 방법으로 회유를 시도했습니다. ‘소꼬리보다 닭머리가 낫지않겠냐?’하시는 선생님이 계셔서 ‘그냥 소꼬리 된 후 더 성장해서 소머리 될겁니다’라고 받아쳤던 기억도 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저도 고집이 어지간히 셌던 것 같아요.

Q.결국 서울체고 측에서 포기를 한 것인가요?
포기는 포기였죠. 하지만 그냥 풀어주는 것이 아닌 아예 제적을 시켜버리더라고요. 그래서 지금 당시 졸업 앨범을 보면 제 사진이 없어요. 단체사진만 어쩔 수 없이 함께 나왔고요. 어쨌든 큰 위기에 빠졌었는데 이게 또 사회문제까지 번졌어요. ‘선택의 문제로 인해 왜 체육 유망주의 길을 막느냐’는 것이었죠. 연세체육회에서도 나서고 제 친척뻘인 모 학교 교장선생님도 힘을 보태주시는 등 여기저기서 도움의 손길이 왔습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저를 졸업처리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죠. 진짜 전쟁이었습니다.



 



“고 김현준 코치와 매일 안산을 뛰었습니다”

Q.원하던 연세대에 갔지만 대학농구는 또 다른 세계였을 것 같아요.

맞아요. 기량좋은 선배들은 물론 전술같은 것도 무척 디테일해서 적응하는데 애좀 먹었습니다. 당시 김동원 감독님하고 최희암 코치가 있었는데, 어휴! 최희암 코치한테 엄청 두들겨맞았습니다. 사람도 좋고 성격도 좋은 편인데 코트에서 훈련할 때는 완전히 달라져요. 호랑이도 그런 호랑이가 없었죠. 어쨌거나 이때 연세대는 당시 국내농구에 없던 다양한 전술과 시스템을 구사했어요. 도널드 휴스턴이라는 인물로부터 여러 가지를 전수받았죠. 그리고 거기에는 최희암 코치의 역할이 컸어요. 휴스턴의 지식을 직접 보고 들으면서 노트에 빽빽하게 필기했다고 하더라고요.

Q.기강도 셌죠?
세다 뿐이에요. 훈련도 장난아니었고 분위기도 당시 막내인 제 입장에서는 많이 살벌했죠. 저희보다 한참 막내동생뻘 되는 선수들도 인터뷰보니까 연세대 기강 정말 엄했다고 하던데 저희때는 오죽했겠어요. 아직 대학농구에 적응하지못한 상태에서 훈련내내 욕만 먹는거에요. 욕과 꾸지람으로 배가 차는 기분이었어요. 거기에 더해 훈련마치면 선배들에게 따로 또 개인 연습받고 남는 시간에는 패턴 그리는 숙제를 마쳐야 했어요. 청소나 그런 것은 말할 것도 없고요. 한 예로 훈련이 끝나면 늘 농구공을 닦아야하는데 그게 깨끗이 수준이 아니라 이른바 광이 나야했어요. 황색 구두약 있잖아요. 그걸 묻혀서 닦았는데 어지간한 구두 이상으로 반짝반짝해야했죠.

Q.어쨌거나 서울체고 시절 노력왕 박종천이 연세대에서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듯 싶어요.
그거야 그렇죠. 열심히 노력해서 흘린 땀은 자신을 배신하지 않습니다. 당시 제가 가장 힘들어했던 부분이 체력이었어요. 안되겠다 싶더라고요. 연세대 뒤에 보면 안산이라고 있어요. 거기를 매일 뛰었어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식사는 걸러도 그것만큼은 잊지않았고 신입생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계속했습니다. 안타깝게 하늘의 별이된 고 김현준 코치가 1년 후배였어요. 그런데 그 녀석도 저처럼 체력이 문제였어요. 아니 저보다 더 안좋은 것 같더라고요. 제가 하던 체력 운동을 권유했고 이후 함께 뛰었던 기억도 납니다. 현준이가 슛은 원체 좋았잖아요. 나중에 체력 문제까지 해결되고 나니까 그야말로 대단한 스타가 되어버리더라고요.

Q.당시 연고전의 치열함은 엄청났을 것 같아요.
지금하고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전쟁이었어요.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한일전같은 분위기였다니까요. 양교 학생들의 자존심이 걸려있었고 장안에서는 축제였죠. 텔레비전 중계까지 해줄 정도였으니까 인기와 관심도는 단순한 대학스포츠 수준을 훌쩍 넘었다고 보는게 맞을겁니다. 그런 말이 있었어요. 연세대와 고려대는 5개 스포츠 종목에 걸쳐서 자웅을 겨뤘는데 종합적인 결과에 따라 다음해 신입생 지원수가 달라진다고요. 학교측에서도 사활을 걸 수밖에 없었겠죠.



 



“언니농구? 그것 싹다 뜯어 엎어버렸습니다”

Q.현대와 삼성의 스카우트 경쟁이 벌어졌는데 최종적으로 현대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일단은 서울체고 시절부터 든든한 선배로 계셨던 선우형이 현대에 있던 것도 영향이 컸고요. 더불어 제가 거액의 스카우트비도 모두 거절하고 연세대로 갔잖아요. 연세대에서 열심히하면서 유명해지기는 했지만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어려웠어요. 그시절 큰 액수는 아니었지만 현대 관계자가 도와준 일도 있었어요. 그런 의리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할까요. 삼성에서 현대가 주는 돈의 따따블을 준다고 했지만 돈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어쨌든 현대, 삼성간 재벌 라이벌 구도는 연세대, 고려대 못지않았어요. 두팀이 참여하면서 농구판도 커졌고요. 점보시리즈가 만들어지는 계기도 됐다고 생각해요. 1982년 뉴델리 아시안 게임에서 저희가 금메달을 따면서 농구가 전국민적인 인기를 얻게됐고 점보시리즈까지 흥행하게되자 오빠부대도 탄생하는 등 일약 인기 스포츠로 도약하게 됐죠. 어쨌든 저로서는 좋은 동료들과 함께 우승도 여러번 하고 나름대로는 열정을 불태웠습니다. 무릎부상이 너무 커서 일상생활도 힘들 수 있을것이다는 최종 진단을 받고 이른 나이에 은퇴했지만 짧은 선수 시절 동안 할건 다 한 것으로 나름 위로를 했죠. 은퇴 후 현대증권에서 5년여간 근무를 했고 이후 선우형 부름을 받고 농구판으로 돌아와 현대시절 포함 KCC 코치로 있으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Q.2002년, 여자프로농구 청주 현대 하이페리온 새 감독으로 임명되었고 데뷔 3개월 만에 우승을 차지했어요. 제대로 뭔가를 준비할 시간도 없었을 듯 싶은데요.
처음에는 갈등도 많이 됐어요. 좋은 기회이기는 했지만 너무 갑작스러웠으니까요. 질문에도 있다시피 뭔가를 제대로 준비할 시간도 부족했고요. 2주 정도 두문불출하면서 온갖 비디오테이프를 돌려보면서 선수단에 대한 공부를 했어요. 노장들이 많던 팀이기도 했고, 어떻게하면 해당 팀의 전력을 극대화할까 많이 연구했죠. 그리고 어느 정도 분석이 됐다 싶은 마음이 들자 찾아가서 해보겠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KCC 고 정상영 회장님께서 ‘필요한게 뭐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가장 먼저 생각이 든게 선수들의 숙소였습니다. 숙소를 한번 가보니 완전 엉망이었거든요. 아파트에서 선수들이 뭉쳐서 지내는데 이건 아니다 싶었던 생각이 들어서 ‘선수들 숙소 마련해주시고 전용 체육관하나 만들어주시면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죠. 그렇게해서 당시 잠깐 쓰고 방치되어있던 핸드볼 체육관과 근처 연수원을 리빌딩해서 선수들을 위한 공간이 제대로 만들어졌던 기억이 납니다. 기본 환경이 갖춰져야 선수들도 흥이 나서 더 열심히 할 것 아닙니까.

Q.환경적인 부분 외에 전략적인 변화는 없었나요?
많았죠. 당시 현대는 전주원 위주로 모든 것이 돌아갔어요. 가만히 지켜보니 전주원이 북치고 장구치고 다하는거에요. 어지간한 코치 역할까지. 이건 아니다 싶었어요. 여자농구가 그런게 있어요. 이른바 언니 농구! 물론 경험 많은 선수가 더 노련하고 그런 부분은 있겠지만 후배들이 너무 언니에게 맞춰줘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가장 먼저 한일이 언니 농구를 깨트려버리고 다섯명이 함께하는 시스템농구로 개선했죠. 싹 다 뜯어엎어야겠더라고요. 어쨌든 그런 변신을 제대로 시도하려면 여자농구와 팀에 대해서 많이 알아야되겠죠. 여자농구 지도 경험이 풍부한 방열 교수와 직전 사령탑이었던 정덕화 전 감독을 찾아갔어요. 방열교수에게는 여자들의 생체 리듬 및 심리적인 부분, 대화법 등에 대한 자문을 구했고 정덕화 전 감독에게는 팀내 선수들의 세세한 습관이나 말투까지 전부 알려달라고해서 기록했어요.

Q.짧은 기간이었지만 기초공사를 제대로 하신 것 같아요.
일단 동기부여를 확실히했어요. 이전까지 현대가 우승은 한번도 못했지만 준우승은 했었거든요. 그렇다면 저력이 있는거에요. 어찌보면 매너리즘에 빠져있다고도 할 수 있었죠. ‘너희들도 나이가 있는데 빠른 시간 내에 우승 못하면 더 이상의 기회는 없다. 마지막 힘을 끌어올려 보자’ 는 등의 말로 심리적인 변화를 촉구했고 각종 다양한 변칙수비 등도 장착했어요. 예를 들어 정선민이 있는 팀은 걔에 대한 의존도가 무척 크거든요. 항상 기둥 역할을 하고 있어요. 정선민의 리듬을 깨면 해당 팀의 밸런스도 같이 깨진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상황에 따라 한선수를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정선민에게 수비수를 둘을 붙여버리는 변칙수비를 쓰기도 했고, 슈터들을 상대로는 최대한 슛을 어렵게 쏠 수 있는 수비전략을 적용시켰죠. 현대는 장단점이 뚜렷한 팀이었어요. 노장이 많다는 점은 약점이었지만 반대로 노련미는 확실한 선수들이었죠. 전주원같은 선수들은 말그대로 산전수전 다겪은 타짜잖아요. 아마도 2~3년차 젊은 선수들이 주축이던 팀 같으면 짧은 시간 내에 큰 변화를 주기 힘들었을겁니다. 베테랑들이었기에 여러 가지 변화도 금새 이해하면서 적응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Q.우승하고 다음 달에 사임을 하셔서 주변을 놀라게 했어요.

프런트와 대립이 좀 있었어요. 그 사람 입장에서는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저로서는 이해하려고해도 너무 안맞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좋게 말하면 의협심, 나쁘게 말하면 오지랖이 지나쳤지 않았나 싶어요. 감독으로 들어가는 순간부터 선수들 처우나 주변 환경개선에 신경을 썼잖아요. 이후에도 그런 문제에 너무 몰두했어요. 당시는 피끓는 40대 초반이었으니까요. 선수들에게 우승하면 보너스로 뭘 받고 싶냐고 물어보고 거기에 대해 회장님들한테까지 찾아가서 영업도 하는 등 정말 온갖 것을 다하고 다녔어요. 솔직히 지금은 좀 후회도 합니다. 그냥 다른 감독들처럼 내 갈길만 가면되지 뭘 그렇게 다른 쪽까지 신경을 쓴건지…, 결과적으로 울컥하는 마음을 참지못하고 스스로 걷어차버리고 나왔지만 무엇을 위해 그렇게까지 했나 싶어요. 그때 그냥 나만 생각했으면 지금보다 감독 커리어가 훨씬 좋았을 가능성도 높고요. 하지만 타고난 천성이라는게 있어서 당시로 돌아간다면 또 비슷하게 할지도 모르겠죠. 과거의 저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적당히 해. 너는 그냥 감독 일만 하면 되는거야’

“배신자 오명, 삽시간에 이미지가 나락으로 갔습니다”

Q.2004년, 김태환 감독이 물러난 이후 LG의 새 감독으로 임명되었어요. 하지만 수석코치로서 혼자남아서 감독에 임명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배신자라는 얘기까지 나돌았어요.

솔직히 많이 힘들었던 시절입니다. 신선우 감독님 때처럼 서로 스타일을 잘아는 상태에서 간것도 아니고 수석코치로 불러서 가봤더니 사령탑이 김태환 감독님이라는 것이에요. 좀더 잘 알아보고 신중히 생각하고 갔어야 했는데, 자신만의 전술이 확실한 감독님이라고해서 ‘아, 이분 밑에서는 배울게 많겠구나’싶은 생각에 덜컥 수락했죠. 결과적으로 서로 안맞는 부분도 많았지만 나름대로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팀이 연패에 빠지고 성적이 안좋으니까 패배의 책임을 저한테 떠넘기는 분위기도 적지않더라고요. 아니, 세상천지에 코치한테 그걸 따지는 경우가 어디있습니까. 이래저래 힘들었습니다. 억울한 마음에 항의도 하고 먼저 다가가서 대화도 해보고 그랬지만 그때 뿐이지, 꽉 뭉친 것은 안풀리는 것 같더라고요. 어떤 날은 경기장도 안가고 방에 혼자 덩그러니 있던 적도 있었습니다. 어느덧 의욕도 훅 떨어지고 언제든지 나가라면 나갈 생각까지 하고있었죠. 그러던 어느날 구단에서 불러서 갔더니 갑자기 저한테 감독을 하라는거에요. 속으로 ‘이것 잘못하면 ㅇ되겠구나’싶었어요. 하지만 당시 어수선한 분위기를 수습할 사람이 필요했고 얼떨결에 맡고 말았죠. 아니라다를까 각종 언론에서 저를 ‘모사꾼’, ‘배신자’등으로 마구 불러대더라고요. 지금도 막 나서서 기사쓰신 분들 이름도 기억나요. 거기서 또 울컥해서 같이해대면 팀 분위기만 더 흐려질 것 같았습니다. ‘그래, 마음대로 생각해라’하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Q.이후 성적이 안나왔던 것도 코치시절 받았던 스트레스 영향이 있었을까요?
아니요. 전혀…, 그런 것에 휘둘릴 것 같았으면 농구판에서 오래 버틸수가 없었죠. 이미 감독이 나갈 정도의 팀이면 여러 가지면에서 전력이 다운된 상태라는 것이에요. 어쨌든 팀을 수습하면서 성적은 또 냈어야해서 의욕을 가지고 해보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않았어요. 다소 급조된 감도 있지만 감독을 시켰으면 원하는 그림은 어느 정도 펼칠 수 있게 해줘야잖아요. 그런데 그게 전혀 되지를 않았어요. 당시 라인업에 믿을 만한 가드가 너무 부족해서 노장이지만 강동희를 1년만 더 써보자고 했습니다. 들어주지를 않더라고요.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생뚱맞은 가드를 한명 데려오는거에요. 그 선수는 제가 데리고 있어봐서 알아요. 기량이 어떻다 저떻다를 떠나서 1번에서 팀을 지휘하는 역할과는 맞지않거든요. 어쨌든 크고 작은 것으로 계속 마찰이 생기고 제가 원하는 전력구성 자체가 되지않았습니다. 도저히 안되겠더라고요. 당시 단테 존스를 앞세운 SBS가 엄청난 돌풍을 일으키며 15연승을 하고 있었어요. 우리 팀을 상대로 16연승을 노리고 있었지만 막아냈어요. 그리고는 해당 시즌을 9위로 마친후 사표를 던져버렸습니다.

Q.전자랜드때도 상황이 비슷했던 것 같아요. 그게 오해를 더 사게했고요.
아뇨. 전자랜드때는 달랐어요. 앞서도 언급했다시피 최희암 감독님과는 본래 아는 사이였고 스타일도 어느 정도 알아서 옆에서 보좌해 드리기가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분 역시 저를 충분히 배려해 주셨고요. 문제는 LG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감독님이 그만 두신 후 코치인 제가 그 자리를 이었다는 것 정도겠죠. 하지만 아시다시피 오히려 최희암 감독님께서 적극적으로 나서서 해명해 줄 정도로 문제는 전혀 없었습니다. 트러블이 일절 없었다면 거짓말일 수도 있겠지만 일일이 다 따지자면 끝도 없고요. 전자랜드 감독을 맡았을 때는 그냥 성적이 안나왔어요. 초반 흐름도 좋지 못했던 것 같고요. 그런것까지 일일이 변명 하고싶지는 않습니다.
 



 



Q.2014년 여자프로농구 하나은행을 맡게되면서 좋은 성적을 거두게되요. 남자농구에서는 부진했지만 유독 여자농구에서 성적이 잘나온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실 별것 없습니다. 제가 어느 한쪽에서만 커리어를 쌓은 것도 아니고 양쪽을 두루 경험했잖아요. 장단점이라든지 특성같은 것은 어지간히 알게된 시점이었어요. 다만 이전 남자농구 사령탑 시절과 달랐던 점이라면 상당 부분 제가 추구하는 라인업을 꾸릴 수 있었다는 점이에요. 명장은 혼자 만들어지는게 아닙니다. 단장 등 프런트가 함께 해줄 때 서로 시너지가 나요. 혼자 할 것같으면 각 직책이 왜 필요합니까. 서로간에 그 부분을 책임지고 끌어주라고 생겨난 자리잖아요. 당시 이팀은 제가 처음 감독을 맡았던 현대와는 또 달랐어요. 당시는 동기부여가 된 베테랑들을 최대한 활용했지만 하나은행에서는 선수구성상 다른 멤버가 필요하겠다 싶었습니다. 일부 선수를 빼고는 잘 달리고 체력좋은 젊은 선수들 위주로 개편을 단행했죠. 리바운드 참여 열심히하고 수비로 상대를 압박하고 틈만나면 속공전개하고…, 여기에 잘 따라줄 라인업을 구축했습니다. 이런저런 것을 떠나 이정도만 협조해줘도 충분히 저만의 색깔을 펼칠 수 있었단 말입니다.

Q.이른바 국회의원 인터뷰로 인기몰이를 하셨잖아요. 준비하고 만들어진 캐릭터이실까요?
그럼요. 인터뷰는 팬들과의 또 다른 만남이잖아요. 항상은 아니지만 되도록 준비하려고 노력합니다. 미리 카메라 위치도 알아두면서 자연스럽게 시선처리도 하고요. 팬들에게 눈을 마주치는 느낌도 드릴 수 있고 좀 더 진솔한 마음을 전달하는 것 또한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요. 외국사람과 대화하다보면 무서울 정도로 눈을 부릅뜨는 경우도 많이 겪었거든요. 처음에는 적응이 안됐지만 어찌보면 좀 더 확실한 표현의 방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저도 그렇게 하면 어떨까싶었습니다. 대신 외국과 우리는 정서가 다르니 부담스러울 정도로 도발적인 시선보다는 자연스럽게 쳐다보는게 낫겠더라고요.(웃음) 저도 그게 편하고요. 평상시에도 좋은 문구나 어록 등이 있으면 되내여보는 편이에요. 어울리는 타이밍이 생기면 쓰고 싶어서요.

Q.하나은행에서만큼은 지도자로서 롱런이 기대됐지만 예상치못한 첼시 리 암초를 만났어요.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죠. 어느팀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서는 외국인선수 선발이 정말 중요합니다. 그날도 그랬습니다. 새벽 2시까지 졸린 눈을 비비면서 여러 외국사이트에 들어가 쓸만한 선수가 있나 살펴보고 있던 중이었죠. 그 늦은 시간에 미국에 있는 에이전트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첼시 리라고 조모가 한국인인 혼혈선수가 있는데 다른 팀에서 먼저 정보를 접수해서 계약 일보직전에 있다고.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사진을 보내보라고 했는데 얼핏 보기에도 기골이 장대하고 장난이 아니더라고요. 이것 잘만하면 한팀의 운명을 바뀌는 것은 물론 국가대표팀 전력강화에도 엄청난 플러스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계약 성사 일보 직전이면 다 끝난 것 아니냐?’고 반문했죠. 그랬더니 금액적인 부분에서 의견이 좁혀지질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순간 빈틈이 보이는 듯 했습니다. 얼마를 원하느냐고 물었더니 35만불이면 될 것 같다는 대답이 돌아왔는데 ‘우리팀을 넘어서 한국농구의 기둥이 될 수도 있는데 100만불인들 못주겠어’라는 생각까지 들더라고요. 아침 6시 되자마자 구단주하고 단장한테 전화를 걸어서 이러이러한 일이 있는데 구단결제는 나중에 맡기로하고 일단 미국으로 먼저 떠납니다고 전한 다음 바로 비행기를 탔어요. 그리고 만나보니, 어우야…, 키는 저만한데 손은 더 길더라고요. 사진으로 봤던 위압감 그 이상이었습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저 뿐만 아니라 한국농구의 흑역사가 되고말았죠. 사실 에이전트가 마음먹고 속이려고하면 밝혀내기가 쉽지않아요. 감독이나 구단으로서는 정보망의 한계가 있거든요. 나름 확인한다고 확인했었지만 여러모로 안타까운 일이 되고 말았죠.

Q.마지막으로 여전히 농구인 박종천을 응원해주는 팬들에게 인사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잊혀질만하면 그래도 이렇게 불러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기사로나마 팬 분들에게 근황 및 예전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너무 좋습니다. 농구에 대한 사랑이 큰 만큼 한도 많이 쌓여있는 사람이었는데 이번에 중국에 가서 좀 풀고 왔습니다. 요새 남자농구, 여자농구 할 것 없이 젊은 스타들이 계속 나오는 것 같은데 시즌 시작하면 많이들 찾아주셔서 응원해주세요. 농구인기 상승에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본인제공, KBL 제공

기사제공 점프볼

김종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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