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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현 막판 투입, 금메달 향한 마지막 승부수였죠

조아라유 0

[김종수의 농구人터뷰(62)] '코트의 신사' 김진

 

 



김진(61‧186cm)은 2000년도 초반을 대표하는 명지도자다. ‘코트의 신사’라는 별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매너가 좋은 지도자로 꼽혔다. 하지만 좋은 매너에 가려서(?) 그렇지 그는 ‘코트의 설계자’에 더 가까웠다. 상대적으로 다양한 전략‧전술이 많지 않았던 시절, 김진은 끊임없이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이른바 ‘공부하는 지도자’로 유명했다.

공격시 패스트 브레이크와 세컨 브레이크, 수비에서는 2-3 지역방어를 다양한 형태로 응용하며 풀어나갔고 팀 구성원에 맞게 색깔을 맞추는데도 능했다. 거기에 예상치 못한 한수를 준비해 결정적인 순간 상대의 허를 찌르는 비기도 종종 보여줬다. 더블팁 수비를 깨는데도 일가견이 있었으며 역으로 본인 팀은 로테이션 수비를 통해 거기서 나오는 약점을 최소화했다.

어찌보면 리그 초창기 최고의 지장으로 꼽히던 ‘신산’ 신선우와도 비교될 만큼 많은 전략과 응용법이 돋보였다. 그의 능력이 가장 돋보였던 시기는 2001~02년 사이다. 이전까지 대구 동양오리온스(현 고양 캐롯)는 약체팀 이미지가 짙었다. 전희철, 김병철을 간판으로 내세웠지만 둘은 강팀의 조각으로는 위력적이었지만 조건이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는 힘을 쓰지 못하는 경향이 뚜렷했다. 실제로 오리온스는 직전 시즌에도 하위권에서 고개를 숙인바 있다.

김진 감독은 감독 데뷔 첫해인 2001~02시즌 오리온스를 정규리그 1위에 올려놓은 것을 비롯 챔피언결정전까지 제패하며 통합우승의 영광을 안겼다. 32연패의 치욕을 비롯 약체팀 이미지에 자존심이 상했던 오리온스 팬들로서는 만세를 외칠만한 시즌이었다. 여기에는 김승현이라는 역대급 포인트가드를 신인드래프트에서 3순위로 뽑은 행운도 큰 영향을 끼쳤지만 거기에 맞는 외국인선수를 선발하고 팀 색깔을 재정비하는 등 전쟁 준비를 제대로 갖춘 수장 김진의 공이 매우 컸다.

김진 매직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한일 월드컵이 열렸던 2002년, 대한민국은 축구를 통해 전 국민이 하나가 됐다. 하지만 농구 팬들 입장에서는 20년 만에 만리장성을 넘었다는 점에서 또 다른 감동을 받았던 해이기도 하다. 당시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이 중국을 이기고 금메달을 딸 것으로 예상한 이들은 많지 않았다. 본래도 중국은 힘든 상대이기도 했지만 당시 중국의 선수 구성은 탈 아시아라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막강했기 때문이다.

한국 킬러로 악명높은 장신포워드 후웨이동 등 기존 강자들이 건재했고 무엇보다 NBA 드래프트 전체 1순위로 휴스턴 로키츠에 지명된 야오밍은 존재 자체로 큰 벽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대표팀은 경기후반부까지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였고 근소하게 뒤지던 마지막 순간 엄청난 집중력으로 승부를 뒤집어버렸다.

여기에는 김승현을 아끼다가 막판에 투입하는 등 디테일한 전략을 준비하고 적용시킨 감독 김진의 능력이 크게 빛났다는 평가다. 하지만 이때 자신의 패를 모조리 오픈했던 탓이었을까. LG의 정규리그 우승, 챔피언결정전 준우승을 이끄는 등 이후에도 충분히 잘했지만 2001~02년 사이 모두를 놀라게 했던 엄청났던 퍼포먼스는 점점 줄어갔다.

어찌보면 적어도 한팀 정도에서는 왕조구축도 가능했으리라는 기대를 받았던 김진이었기에 아쉬운 부분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KBL에서 장수 지도자로 활약하면서 보여준 선구자적인 면면은 후배 지도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리그발전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만은 분명해보인다.


 

 



“물 좋고 공기 좋은 제주도에서 야인생활을 즐기고 있습니다”

​Q.요새 어떻게 지내십니까?

2001~02시즌 오리온스 감독으로 데뷔한 이래 SK, LG 등을 거쳐 2016~17시즌까지 지도자 생활을 해왔습니다. 조금만 삐끗해도 갈 곳을 잃어버리는게 감독의 길인데 운 좋게도 참 오래 버티고 생존해왔었구나 싶더라고요. 지난해까지 KBA이사, KBL 재정위원 등 행정 쪽에 있다가 이제는 완전히 완전히 발을 떼고 야인으로 돌아가 있는 상태입니다. 시원섭섭한 마음이지만 할만큼 했고 현재는 한걸음 떨어져서 자신을 돌아보는 과정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은 제주도에 있습니다. 국가대표 감독 공모에서 탈락한 이후 바로 왔으니까 한 2년 정도됐네요. 본래는 제주도 어린 학생들에게 농구를 가르쳐주는 재능기부 그런 목적으로 왔어요. 그러다가 한 중소기업에서 일을 도와줄 것을 제의받아서 함께 하고 있어요. 꾸준히 아이들을 봐주려고는 하지만 일을 하면서부터는 시간이 많이 나지 않아서 자주 하지는 못하고 있네요.

​Q.말씀하신데로 당시 농구 후배 김영만과 함께 팀을 이뤄서 국가대표 감독 공모에 지원을 했어요. 학교도 팀도 같지 않은데 친분이 깊은 듯 보여요.
함께 농구하던 사이인데 다들 친하죠. 맞아요. 학교나 팀으로만 따지면 저하고는 별반 인연은 없죠. 저는 고려대 삼성 라인이고 (김)영만이는 중앙대 기아 라인이죠. 나이 차이도 좀 나는 편이라 제가 은퇴할 즈음 영만이가 데뷔했고요. 하지만 농구관이나 성향 등이 비슷하다 보니 함께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비록 원하는 결과는 얻지 못했지만 과정 자체에 대해서는 만족합니다. 늘 원하는 결과만 얻을 수는 없는 것이잖아요.

​Q.비록 탈락은 하셨지만 그만큼 최근 선수들이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았나 싶어요. 유달리 장신포워드가 많은 세대잖아요.
격세지감이라고나 할까요. (한)기범이같은 케이스도 있기는 했지만 아주 특별한 경우고 저희 때만해도 190cm초반대 빅맨도 많을 정도로 사이즈가 그다지 크지 않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 정도 신장의 가드도 흔하게 볼 수 있을 만큼 전체적으로 사이즈업이 됐잖아요. 190cm후반에서 심지어 2m대 가드나 슈터까지도 나왔으니까요. 국제 경쟁력을 위해서도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우리 선수 시절에 ‘앞으로 2m넘는 가드도 볼 수 있을 것이다’그런 말하면 아무도 안 믿었을 것 같아요.

​Q.만약 지금 프로팀 감독을 맡게 되고 이현중-여준석 중에 한명을 데려올 수 있다면 누구를 선택할 건가요?
그 정도 사이즈에 재능을 가진 기대주들이라면 누구라도 탐을 낼 수밖에 없겠죠. 팀의 전력을 업시켜 줄 것임은 분명하니까요. 다만 두 선수를 놓고 보면 누가 더 낫다 그런 것을 평가하기 어려운 시점같고요. 해당팀 색깔과 선수 구성 등을 보면서 거기에 누가 더 맞냐로 판단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너무 모범적인 답안인가요? 하지만 그게 사실이니까요. NBA로 비교해본다면 적절한 예가 하나 떠오르네요. 지금은 은퇴해서 추억의 선수가 됐지만…, 제이슨 키드와 게리 페이튼요. 개인 능력으로는 우열을 가리기 힘든 선수들이잖아요. 다만 플레이 색깔이 다르니 팀마다 현재 상황에 따라서 원하는 순번이 달라질 것 같아요.



 



“후배의 신경질적인 반응에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주먹이 날아갔습니다”

​Q.농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하하핫…, 워낙 오래전 얘기를 물어보시니 가물가물한 추억이 떠오르네요. 제가 원주에서 농구를 시작했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 시작했는데 소년체전 등에서 3위에 입상하는 등 나쁘지않은 성적을 올리면서 조금씩 이름을 알리게 됐죠. 그 당시에 농구를 하게 되는 과정은 다들 비슷했을거에요. 선생님들이 각반마다 돌아다니면서 키 큰 친구들을 선별해요. 그리고는 공을 나눠주고 놀게 하던가 조금씩 가르쳐주면서 나름대로의 테스트 과정을 거치는 거죠. 저도 그렇게 하게 됐는데 농구를 하는 과정이 힘든 만큼 재미있기도 해서 나름 적성에 맞았던 듯 싶어요. 포지션은 1, 2번을 오가는 형태였어요. 포인트가드도 봤다가 슈팅가드도 봤다가 그랬던거죠.

​Q.이충희와 고려대에서 함께 활약했는데 이후 실업팀은 김현준의 삼성으로 갔어요. 당시 고려대는 현대 성향이 강하지 않았나요?
그건 아니에요. 아무래도 이충희 선배의 존재감이 워낙 강해서 고려대하면 현대다는 이미지도 생겨난 듯 싶은데 제가 있을 때는 반대였어요. 삼성에 있는 고대 출신들이 더 많았죠. 워낙 그 선배의 이미지가 세기도 하고 라이벌로 부각됐던 저희팀 김현준 선배가 연세대 출신인 관계로 그런 편견이 더욱 고정화된 부분도 있었을 겁니다. 어쨌든 지금도 전설로 회자되는 두 선배 모두와 한팀에서 동료로 뛰어봤다는 것은 지금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자기관리도 대단하고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배울게 많은 선배들이었습니다.

​Q.당시 삼성의 멤버는 꾸준히 강했던 것 같은데 기아자동차에게 밀려서 2인자 이미지가 강해요.
그렇죠. 저희 뿐만 아니라 현대도 같은 입장이었을거에요.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의 경우 특별한 몇몇을 빼고는 대부분 레알 마드리드와 FC 바르셀로나 출신이었다고 하더라고요. 저희도 비슷했어요. 농구국가대표팀은 대부분이 삼성, 현대 쪽에서 채워졌죠. 그러다가 기아자동차가 창단되고 중앙대 신성들이 들어오면서 사실상 큰 틀의 세대교체가 이뤄졌다고 보는게 맞을 듯 싶습니다. 다들 잘 아실 것 아니에요. 높이면 높이, 가드면 가드, 슈터면 슈터 포지션별로 약점이 없는 팀이었잖아요. 거기다 젊고 잘 뛰기까지 하니까 사실상 적수를 찾기가 어려운 팀으로 금세 올라섰죠.

​Q.1994년, 농구대잔치를 한 달 앞두고 열린 실업농구 코리안리그 2차 대회에서 한기범에게 주먹을 날려 코피를 터트립니다. 당시 한기범이 경기중 일어난 신경전에 대해 사과하려고 삼성 벤치로 갔고 악수를 청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었고 공중파 중계방송도 되고 있었다면서요?
어이쿠! 잊혀져 가고 있던 저희 흑역사를 들추시네요. 그건 어떻게 또 기억을 하고 계셨데요. 그 일로 제가 욕도 많이 먹었죠. 개인적으로도 해서는 안될 실수를 저질렀다고 생각하고요. 지금도 당시를 기억하는 팬들 중에서는 ‘무슨 코트의 신사냐?’그러시는 분도 있습니다. 당연한 반응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사자와는 풀었다고 하지만 팬분들에게는 큰 실망을 안겨줬던 사건인지라 모범을 보여야 할 선수 입장에서 거듭 죄송할 따름입니다.

Q.악수를 청하는 상대에게 주먹을 날렸다는 것은 사실 이해가 가지않거든요. 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맡기고 당시 상황에 대해 자세히 좀 들어볼 수 있을까요?
음…, 여러 곳에서 관련 글을 보기는 했어요. 사실과 다른 부분도 많더라고요. 하지만 뭐 좋은 일이라고 또 나서서 틀리네 맞네 그러겠어요. 이유야 어쨌건 제가 잘못한 것은 맞으니까요. 다만 계속해서 궁금해하시고 물어보시니까 있는 그대로 말씀은 드려보겠습니다. 사실 (한)기범이하고는 태릉선수촌 시절에도 룸메이트를 했던 사이로 상당히 친합니다. 개인적인 감정같은 것은 전혀 없었고 외려 친근감이나 좋은 마음이 가득한 관계라고 보는게 맞을겁니다. 1994~95 농구대잔치를 한달 앞두고 열린 실업농구 코리안리그 2차 대회였어요. 저는 그때 은퇴가 멀지 않은 노장이었고요. 마침 상황이 벌어지는 시점에서는 벤치에 앉아서 후배들의 플레이를 지켜보고 있었어요. 기아랑 맞붙으면 언제나 치열한 그런 것도 있었지만 당시 결승이었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역시나 신경전 등도 장난이 아니었죠. 그때 저희팀 (이)창수가 기범이와 매치업이 됐어요. 창수는 젊은 피였고 기범이도 승부욕이 강한 친구였죠. 경기내내 밀고 당기고 부딪히면서 정말 치열하게 경합하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기아 쪽에 있는 어떤 선수가 슛을 성공시켰어요. 그때까지도 창수와 기범이는 서로 옥신각신 엉켜 있다시피 하면서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죠. 다른 선수들하고 거리가 있는 상황에서 둘만 덩그러니 한쪽 공간에 있던지라 유달리 움직임이 더 잘 보이기도 했어요. 어쨌거나 골을 먹었으니 다음 동작을 준비해야 될 것 아니에요. 창수에게 ‘프런트 코트’로 넘어가라고 소리쳤죠. 그 순간 믿기 힘든 일이 벌어졌습니다. 







Q.저도 관련 글에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한기범의 팔꿈치에 이창수가 얻어맞았고, 흥분한 이창수가 피를 흘리면서 덤벼들었다고 하더라고요.

팔꿈치로 맞은 것까지만 같고 나머지는 좀 다릅니다. 한사람이 공을 가지고 있다던가 아님 직접적으로 득점이나 리바운드에 관련된 플레이를 하려고 몸싸움을 벌이는 과정이었다면 이해를 합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은 그런 것과 전혀 관련이 없었습니다. 프런트 코트로 넘어가라는 소리에 창수는 바로 뛰어나갔는데 그 순간 기범이의 팔꿈치에 안면을 제대로 얻어맞았습니다. 무방비 상태로 가격을 당한 창수의 코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는데 바로 앞에서 지켜보던 제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더라고요. 창수가 피를 흘리면서 덤벼들었다고 알려지던데 후배이기도하고 성격도 순한 녀석이라 그냥 맞고 가만히 있더라고요. 이건 아닌데 싶었습니다.

​Q.그래서 거기서 분노하셔서 바로 달려들어가 펀치를 날리신 것인가요?
아뇨, 아뇨. 자꾸 사람을 파이터로 만들려고 하시네.(웃음) 어쨌거나 타이밍이 안 좋았던게 심판의 눈은 공을 따라가잖아요. 공이 넘어가는 쪽으로만 시선이 쏠리다 보니 그것과 관계없이 몸싸움을 벌이고 있던 창수와 기범이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던 거죠. 결국 문제의 팔꿈치 사건이 일어나는 순간 심판은 해당 장면을 놓쳤고 바로 앞에서 쳐다보고 있던 저희들이 발끈 하면서 항의를 했지만 결국 유야무야 넘어가듯 흘러가게 됐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제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되더라고요. 그래서 경기 끝나고 서로 마주 보고 인사를 할 때 기범이한테 슬쩍 다가가서 말했죠. 네가 선배이기는 하지만 이미 경기는 끝났고 적지 않게 다친 것 같은데 사과를 해라. 그게 도리인 듯 싶다고 했습니다. 누가봐도 고의성이 명백했지만 거기서 기범이가 휙하고 가버린다면 본인이 고의였다는 것을 확실하게 인정하는 꼴이 되기도 하고요. 창수를 위해 나선 것이기는 했지만 기범이를 위해서도 그게 맞았습니다.

​Q.받아들이지 않았군요?
맞습니다. 그냥 거기서 사과만 했으면 더 이상 앙금도 남지 않고 좋게좋게 넘어갈 것 같았는데 감정이 격했는지 거절하더라고요. 하지만 정말 이건 아닌 듯 싶어서 사과하러 가자고 손을 잡고 끌어당겼죠. 손을 뿌리치더라고요. 그렇게 몇 번을 반복했습니다. 제가 자꾸 손을 잡고 당기고 본인이 뿌리치는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까 기범이도 짜증이 났나봐요. 갑자기 욕설을 내뱉더라고요. 욕이 나오는 그 순간 반사적으로 주먹이 나가고 말았습니다. 어찌보면 그것마저도 참았어야 하는데 뭔가를 생각하고 나온 행동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그렇게 되어 버린 것 인지라 상황이 그렇게 되고 말았죠. 같은 팀 후배를 위해서, 양 팀의 이후 관계를 위해서 등 그럴듯한 얘기로 포장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지금도 후회스럽습니다. 그일로 징계도 받고 그러기는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약간의 반전이 숨겨져 있기도 하더라고요.

​Q.반전요?
당시 창수가 군대에서 막 제대해서 삼성에 들어온 상태였거든요. 몇 달 전만 해도 상무 소속이었던 거죠. 그때 상무에 있을 때 기범이랑 매치업이 되었는데 그때도 엄청 치열했었나 봐요. 상무가 군인 정신을 강조하다 보니 거친 플레이가 유달리 많기는 했죠. 그러다가 당시에는 삼성 기아전과는 다르게 창수가 격한 플레이를 펼쳐서 기범이에게 데미지를 줬나봐요. 기범이는 나름대로 그것은 마음 속에 담아두고 있었던 거죠. 그리고 그날 경기에서 나름대로 복수를 한 것 같습니다. 얘기를 듣고 나니 어느 정도 납득은 됐지만 그렇다 해도 그런 식으로 되갚는다는 것은 옳지 못한 행동입니다. 삼성 선배로서 후배의 그런 모습을 보고 그냥 넘어 갈 수도 없었고요.


 

 



“골드뱅크에서 전형수를 뽑는 순간 속으로 만세를 외쳤습니다”

​Q.공부를 많이 하는 지도자로 알려져 있는데 선수 은퇴 후 곧바로 선진농구를 배우러 유학을 떠나셨나요?

그럴려고 했죠. 향후 혹시라도 지도자를 하게 되면 남들보다는 공부도 좀 더 하고 여러 가지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마침 환경도 좋았어요. 미국 UCLA와 삼성의 관계가 무척 좋았거든요. 자매결연을 맺었다던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해마다 삼성이 그쪽으로 전지훈련을 가면서 코칭스태프끼리도 친분이 쌓이고 서로 오가고 그랬죠.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디펜시브 코치 스티브 레빈, 오펜시브 코치 로렌조 로마 등이 기억납니다. 국내에 들어와서 함께 숙식을 하면서 삼성훈련에도 참여하고 그랬습니다. 그런 관계가 있었던지라 기회가 있을 때 좀 더 세밀하게 미국의 선진농구를 배우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그때 상무에서 감독제의가 들어왔습니다.

​Q.흔하게 올 수 있는 일은 아니잖아요. 갈등이 되셨을 듯 싶어요.
기존 박광호 감독이 오리온스 창단 초대감독으로 가게 되면서 공석인 자리를 맡아달라는 것 이었죠. 좋은 기회라고는 생각했지만 나름대로 생각했던 플랜이 있었기에 몇 차례에 걸쳐서 고사를 했습니다. 그때, 친분이 있던 허진석 교수님께서 ‘상무감독을 경험해 보는 것 만으로도 큰 공부가 될 수 있다’는 조언을 해주셨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삼성 측에서도 꾸준히 설득을 해서 결국 상무행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1년 정도 있다가 박감독님을 따라서 오리온스 코치로 합류하게 됐죠. 사실 오리온스 시절에 펼쳤던 다양한 전략은 UCLA와 삼성이 교류하던 시절 배운게 대부분이에요. 언젠가 써먹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캠프 내내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하나하나 메모도 하고 기록으로 남겨놓는 등 열심히 공부했던 것이 어지간한 유학 생활 이상의 배움을 준 것 같아요. 유학 생활에서의 공부는 SK 감독을 그만두고 잠시 야인생활을 할 때 LA레이커스 훈련캠프에 운 좋게 참여하면서 많이 배운바 있죠. 사실 아무리 선진농구를 배운다고 해도 한국농구에 녹여내지 못하면 의미가 없어요. 미국과 한국은 선수들부터 다르고 문화, 환경에서도 차이가 크죠. 공부도 많이 해야 하지만 응용도 잘해야 하는지라 양쪽의 농구를 모두 깊이 있게 이해하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Q.동양 오리온스를 맡았던 첫시즌 외국인선수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로 마르커스 힉스를 뽑아서 화제가 되기도했어요. 당시 가장 유력한 1순위 후보는 안드레 페리였거든요. 사전에 힉스에 대한 분석이 들어갔었나요?
거기에 대한 얘기를 하려면 배경 설명이 조금 필요할 듯 싶어요. 지금은 해외 작은 리그에서 뛰던 외국인선수까지 프로필, 전력분석이 쫙 세팅되어서 나오는 시대잖아요. 각 팀 별로 전력분석팀도 부지런히 뛰고 있고 직업인이 아닌 마니아 팬 중에서도 전문가 수준의 분들이 계신 듯 싶더라고요. 하지만 당시는 초창기이기도 하고 그런 정보 같은 것을 얻기가 어려웠어요. 잘 걸리면 대박 안되면 운이 없다 그런 식으로 치부되고는 했죠. 그래서 에이전트의 한마디에 많은 면을 기댈 수밖에 없었어요. 감독하기 1년전 코치 시절에 에이전트로부터 외국인선수 한명을 추천받았어요. 막슛으로 유명한 데니스 에드워즈죠. 그래서 본래는 에드워즈를 생각하고있었는데, 또 다른 정보망을 통해 더 좋은 선수가 있다고 해서 그 선수로 선회하게 됐죠. 사실 경력은 더 좋았어요. 하지만 정말 압도적인 차이가 아니면 NBA 경력을 가지고 있네 하는 것 등이 꼭 성공을 의미하지는 않는 듯 싶어요. 국내리그에 맞는 선수가 있고 적응력이 좋은 선수가 또 있죠. 결과적으로 당시 저희는 외국인선수에서 실패를 맛봤고 SBS는 에드워즈의 득점력으로 인해 쏠쏠한 혜택을 봤죠. 그때 더 확실하게 느꼈습니다. 이름값이나 경력보다는 직접 눈으로 보고 선수를 뽑아야겠다고.

​Q.힉스를 처음보는 순간 느낌이 왔나요?
사실 첫인상은 그저 그랬습니다. 일단 너무 말랐고 슛폼이라던지 그런 부분에서 매끄럽지 못하더라고요. 그래서 반신반의하고 있었는데 힉스를 데리고 있던 전임 감독이 장점에 대해서 어필을 계속해줬습니다. 공격패턴은 다르지만 에드워즈만큼의 득점력을 보유하고 있고 거기에 더해 그에게는 없는 패싱능력, 높은 점프에서 오는 블록슛 능력 등을 겸비한 선수라고. 한마디로 업그레이드 에드워즈인 셈이죠. 그 말이 맞다면 안 뽑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확인작업을 거쳐 가면서 확신을 가지게 됐죠. 사실 처음에는 힉스같은 유형보다는 골밑에서 좀 더 무게감 있게 활약할 수 있는 유형을 원했습니다. 저뿐 아니라 당시 추세가 다 그랬잖아요. 그러다가 (김)승현이를 신인드래프트에서 뽑게 되면서 자신있게 지명 할 수 있었죠.


 



 

 



Q.확실히 김승현이라는 존재가 끼친 영향력이 엄청나네요.
그렇죠. 승현이를 뽑을 수 있었던 것은 천운이었죠. 그간 오리온스는 1번 포지션이 없어서 골치였거든요. 바로 거기서 해결이 되어버리니까 전체적인 팀 운영이나 전력구성이 원활하게 된 부분도 큽니다. 사실 당시 저희는 신인드래프트에서 2순위가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당시 모두가 생각하는 1순위는 송영진이었어요. 어찌보면 당연했죠. 간만에 나온 대형 토종 3번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김승현을 마음속에 품고 있던 저희 입장에서는 1순위가 나오면 살짝 갈등이 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속 편하게 2순위를 원했던 거죠. 하지만 뭐든지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충격적이게도 3순위가 걸려버린거에요. 암담했습니다. 내심 2순위 골드뱅크가 다른 선택을 하기를 바라기도 했지만 큰 기대는 안했어요. 누구라도 승현이를 뽑을 가능성이 컸더든요. 헌데 이게 웬일입니까. 골드뱅크측에서 덜컥 전형수를 뽑지 뭐에요. 속으로 만세를 외쳤습니다. 저희 입장에서는 1순위에 뽑힌거나 진배없었습니다.

​Q.결과적으로 힉스 선택은 신의 한수가 됐네요.
결과만 놓고보면 그렇죠. 하지만 당시 분위기에서는 지명 당시부터 완전 이변이었죠. 승현이가 있는 상태에서 확신을 가지고 힉스를 지명했는데 기자분들은 물론 관계자들까지 난리가 난거에요, 저 깡마르고 유명하지도 않은 선수를 무려 1순위로 뽑은 것은 실수다는 의견이 태반이었죠. 아시다시피 당시 모든 시선은 안드레 페리를 향해 있었거든요. 하지만 저는 자신있었습니다. 예전부터 빠른 농구를 하고 싶었는데 마침 선수 구성원이 거기에 잘 맞았어요. (김)병철이, (전)희철이, (박)재일이 모두 빠르게 달릴 수 있는 선수였어요. 화룡점정으로 승현이라는 확실한 지휘관도 생겼고요. 외국인선수까지 기동성을 갖추면 최고의 호흡이었던 거죠.

​Q.어쨌거나 힉스는 1순위로 뽑은 외국인선수인데 반해 라이언 페리맨을 무려 20순위로 뽑았는데 정말 잘했어요. 어쩌면 진정한 대박은 페리맨같아요.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어느 정도 운도 따랐죠. 포워드형 외국인선수를 뽑은 상태에서 나머지 한명은 골밑을 지킬 선수가 필요했거든요. 당시 페리맨을 추천받기는 했어요. 하지만 빅맨으로서 언더사이즈에 팔도 짧고 솔직히 미덥지 못하더라고요. 그러다가 당시 대학농구 협회 책자를 보니 그 사이즈로 리바운드 2위를 했다는 부분이 눈에 띄었습니다. 확실히 그쪽으로는 재능이 있다는 거죠. 어차피 20순위로 마음에 드는 선수를 뽑기는 어렵다고 봐야 해요. 아니라 다를까 다른 팀에서도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저희 순번이 오자 미련없이 페리맨을 선택 할 수 있었습니다.

​Q.힉스, 페리맨 외에도 네이트 존슨, 리 벤슨, 피트 마이클, 데이본 제퍼슨 등 출중한 외국인선수들과 함께 했습니다. 그중에서 최고는 누구라고 생각하나요?
이게 네임밸류나 기록만 가지고 따질 것은 없는 듯 싶어요. 누가 더 팀에 더 잘 녹아들었냐가 저한테는 최고의 기준입니다. 농구는 단체 스포츠인지라 상생이 기본이니까요. 그리고 그만큼 함께 잘했다면 팀 성적이 안 나올 수가 없고요. 제퍼슨의 이름도 질문에 있지만 저는 오히려 그와 함께 뛰었던 크리스 메시가 더 기억에 남습니다. 김시래와의 2대2 등은 메시가 더 좋았으니까요. 바비 레이저도 저희와 할 때는 잘했는데 딴팀에 가서는 별로더라고요. 그런 경우가 의외로 많아요. 여기서 잘했는데 저기서는 못했고, 다른 팀에서 별반 활약이 없었지만 어쩔 수 없이 데리고 왔다가 완전히 다른 선수가 되어서 펄펄 날기도 하고요. 국내리그서 퇴출된 선수가 NBA 콜업도 받고 그러잖아요. 기본적인 기량이 있는 선수들은 팀과의 궁합 여부에 따라서 가치가 달라지는 듯 싶어요.



 



“김승현 카드, 의도적으로 끝까지 숨겼습니다”

​Q.2002 부산 아시안게임 결승전 역전승의 쾌거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어요. 당시 김승현을 끝까지 아끼고 있다가 막판에 조커로 투입해 중국의 허를 찔렀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당시 시합 전부터 박건연 코치하고도 얘기가 되어있던 부분이에요. 전략적으로 김승현 카드를 비기로 숨겨두고 있었죠. 중요한 순간에 풀어서 상대를 당황시키려는 의도였습니다. 물론 필리핀전에서 이상민의 버저비터 3점슛으로 겨우 이기는 등 힘든 과정도 있었지만 하나하나 퍼즐이 잘 맞아떨어져서 결과까지 좋게 나온 것 같아요. 결승전 중국전에서도 막판까지 점수차가 크지 않았기에 김승현 카드로 역전승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죠. 승현이 입장에서는 그 시간에 자기를 내보내서 조금 불만스러운 부분도 있었던 듯 싶은데 거기서 본인이 제대로 색깔을 보여주면서 결과적으로 팀이나 개인이나 함께 빛났잖아요. 승현이는 제가 데리고 있던 선수인데 어찌 모르겠어요.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애정도 더 깊었으면 깊었지 떨어질 리는 없었죠.

​Q.막판 김승현의 활약은 짧지만 굉장히 눈부셨어요.
대회 전부터 많은 생각을 했어요. 만약 우리가 결승전에 올라갈 수 있다면 전력상 반대 쪽에서 올라올 팀은 중국이 유력하거든요. 그렇다면 어떻게 중국을 상대할 것인가에 대해서 분석하고 또 분석했죠. 일단 중요한 순간 그들을 놀래키고 당황시킬 비밀병기가 필요했습니다. 그게 방성윤하고 김승현이었죠. 다른 선수들은 이미 각국에서 전력 분석이 많이 되어있는 상태였어요. 반면 성윤이하고 승현이는 이제 막 국가대표팀에 입성한 선수들이에요. 상대 팀들에게 분석이 제대로 안되어 있단 말이에요. 히든카드로 딱이죠. 선발할 당시부터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더불어 중국 선수들의 면면을 봤을 때 야오밍, 후웨이동 이런 선수들은 솔직히 답이 없더라고요. 류웨이가 이끌고 있는 가드진이 그나마 해볼만 할 듯 싶었습니다. ‘여기를 노리자!’고 계획했고 중요한 순간에 풀코트 프레싱(전면강압수비)을 들어갈 생각이었는데 그 중심에 빠르고 손질에 능한 승현이가 있었던 거죠. 실제로 류웨이를 압박해서 중국대표팀 전체를 흔들어버렸고요.

​Q.LG시절 김종규, 김민구 등을 뽑기 위해 일부러 탱킹을 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어요. 다른팀들도 의혹을 받기는 했지만 유독 LG에게 비난이 컸죠.
거기에 대해서는 정말 할말이 없습니다. ‘왜 나만 가지고 그래’라고 말한다는 것 자체가 가슴 아픈 일이죠. 지도자마다 자기의 지도관이 있고 추구하는 바가 있습니다. 고집을 부려서라도 ‘이건 아니야’라고 소리치고 싶을 때도 있고요. 그것이 제대로 되지 않았을 때는 참 많이 힘듭니다. 결과적으로 (김)종규를 뽑기는 했지만 저 또한 과정이 매끄럽고 좋았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습니다.

​Q.마지막으로 여전히 농구인 김진을 기억해주시는 팬분들에게 인사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팬분들을 생각하면 항상 미안하고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팬분들의 열정적인 응원을 보면서 저 역시 많은 것을 배워나갔습니다. 저분들이 아무런 대가없이 저렇게 응원하고 좋아해 주시는데 더 열심히 해서 조금이라도 기쁘게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안들 수가 없더라고요. 지금도 응원팀을 열광적으로 응원하고 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보다 더 즐겁게 응원할 수 있도록 응원팀이 좋은 경기 내용과 성적 거뒀으면 좋겠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요.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KBL 제공, 본인제공
 

기사제공 점프볼

김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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