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업레이어 알림

팝업레이어 알림이 없습니다.
     뉴스/이슈

“삼성갈뻔 했지만 현대, 운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주간관리자 0

[김종수의 농구人터뷰(39)] ‘여왕벌' 권은정

 

’소금같은 플레이로 팀을 강하게 만들어주는 선수!‘ WKBL 초창기 상당한 인기몰이를 했던 현대 하이페리온의 팬들이 기억하는 권은정(49‧172cm)의 이미지다. 당시 현대하면 ’현대가의 상징‘ 전주원을 비롯 끊임없이 코트를 뛰어다니던 ’총알낭자‘ 김영옥이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져있다.

하지만 이른바 현대 찐팬들 사이에서는 권은정의 존재감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그녀는’여왕벌‘이라는 별명처럼 중요한 순간 독침을 날려 상대팀의 숨통을 끊어버리는 무시무시한 저격수이자 킬러였다. 조금의 빈틈만 생겼다 싶으면 거리불문하고 거침없이 외곽슛을 격발시켰으며 상대의 신경이 슈팅에 쏠렸다 싶은 순간에는 파워넘치는 드라이브인으로 수비진을 찢어버렸다. 플레이 하나하나에 에너지가 넘쳐흘렀다.

팀 동료 김영옥이 ‘교과서같은 슈터였다’고 극찬할 만큼 플레이에 기복이 적었고 그로인해 소속팀 현대에서는 물론 국가대표팀에서도 제몫을 톡톡히 해냈다. 정규리그 통산 147경기(농구대잔치 시절 기록 제외) 평균 8.12득점, 1.54어시스트, 2.3어시스트의 기록만 놓고보면 다소 아쉬워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녀의 진가는 양보다 질에 있었다는 평가다.

성적에 대한 욕심보다도 팀플레이를 우선시했으며 중요한 순간 해결사로 떠오르는 경우도 많았다. 자신이 주연이 아니라도 팀만 이기면 된다는 마인드를 가지고있던 선수였다. 1999년 8월 17일 신세계 전에서 3점슛 7개 포함 43득점을 몰아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득점 감각 자체는 탁월했다. 때문에 같은 현대 동료들은 물론 타팀 선수들 사이에서도 그녀에 대한 평판은 무척 높은 편이다.

공격형 가드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탱크 김지윤은 "전나영, 박명애, 왕수진, 김영옥, 이언주, 박정은, 변연하 등 그 시대에는 빼어난 슈터가 유달리 많이 배출됐다. 당장 이름만 떠올려봐도 열손가락이 모자랄 정도다. 은정 언니 역시 누구와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는 본인 만의 색깔이 확실한 슈터였다고 기억한다. 언니 쪽으로 공이 가고 스탭이 맞춰졌다 싶은 순간 여지없이 한방이 터졌다. 빈공간에서 받아먹는 슛도 잘던졌지만 무빙슛에도 일가견이 있던 기억이 난다. 말 그대로 매우 위협적인 저격수였다"고 말했다.

유영주 전 부산 BNK 프로농구단 감독 또한 선수 시절 권은정에 대한 기억이 각별하다. 유감독은 “항상 긍정적인 생각과 웃는 얼굴로 주변을 밝게 만들어주는 후배였다. 함께 있으면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선수로서도 매우 뛰어난 슈터였다. 단순히 슈팅이 정확한 것을 넘어 어깨가 좋아 먼거리에서도 적중률이 상당히 좋았다. 파워 슈터같은 느낌이었다. 거기에 포지션 대비 수비도 좋았다. 심지어 가드 포지션임에도 파워포워드인 나를 수비한 적도 있다. 당시의 나는 4번 중에서도 힘이 좋은 편이었는데 2번 포지션 선수가 함께 몸싸움을 하고 리바운드 경합을 하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후배의 현역 시절을 회상했다.

 



“남북 통일농구대회가 우리 가족을 만들어주었습니다”

Q.요새 어떻게 지내세요?

2019년까지 수원대학교 감독을 했었고요. 현재는 좀 자유스럽게 농구 관련 일도 들여다보고 그러는 중이에요. WKBL에서 진행하는 것 중에 초등학생들을 가르치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전직 선수 출신들이 참여하고 있는데 저도 여기에 함께 하면서 몇몇 초등학교에서 수업을 나가고 있고요. 얼마전에는 온양여고에서 한달 정도 선수들을 지도했습니다. 온양여고 코치가 청소년대표팀 코치로 발탁되면서 공백이 생긴지라 제가 잠시 대타로 투입된거죠. 그리고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남편이 사무국장, 제가 회장으로 있는 비영리단체가 있어요. 농구꿈나무 키우기, 은퇴 선수들의 진로확대 등 농구에 대한 이런저런 애정을 나누기위해 만들었죠. 거기도 꾸준하게 신경쓰고 있습니다.

Q.정주현 전 코오롱 감독과 이옥자 전 KDB생명 감독에 이은 국내 두 번째 ‘부부 농구감독’으로도 유명했어요. 남편분은 어떻게 만나신건가요?
그랬죠. 지금은 둘다 현직에서 물러나있기는하지만 제가 수원대학교 감독을 하고 신랑이 KEB하나은행(이환우) 사령탑을 맡으면서 부부감독이라는데 관심이 쏠리더라고요. 신랑도 저도 농구인으로서 농구 관련 일을 쭉 할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어쨌거나 감사한 일이었죠. 1999년 9월 평양에서 있었던 ‘남북 통일농구대회’가 인연이 됐어요. ‘평양 류경 정주영체육관‘개관을 기념해 열린 대회였는데 공교롭게도 남편(현대전자)과 저(현대산업개발) 모두 현대가 소속인지라 자연스럽게 참가하게된거죠. 남자부 이상민, 조성원, 추승균, 여자부 (전)주원 언니, (박)명애 등 유명한 선수들이 모두 나왔어요. 사실 그전까지는 서로 자기 농구하는데 바빠서 남자부에 누가있고 그런지 잘몰랐어요. 신랑도 마찬가지였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다가 거기서 딱 만나서 확 친해지게됐죠. 솔직히 말하면 제가 좀 적극적으로 다가갔어요. 확 호감이 가더라고요.(웃음)

Q.오, 되게 여성적인 이미지와 달리 그 순간만큼은 적극적이셨던 것 같아요.
음…, 제 생각은 그래요. 좋은 인연을 만나는데 있어서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솔직히 마음을 표현하는게 좋은듯 싶어요. 머뭇거리다가 놓치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그렇게 안했으면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지도 모를일이고요. 어쨌거나 그래서 결과도 좋았잖아요.(웃음) 그런데 성격이나 성향적인 부분은 타고난 것도 있겠지만 시간이 가면서 조금씩 바뀌기도 하더라고요. 어릴 때는 마냥 수줍고 소극적이었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표현도 더 잘하게되고 자기 주관도 뚜렷해진다고나 할까요.

Q.아드님이 농구를 한다고 들었어요.
맞아요. 경복 고등학교 1학년생이고 현재 농구를 하고있어요. 신랑이 184cm 제가 172cm인데 아들은 현재 180cm에요. 일반 학생으로 봤을 때는 큰 키지만 아무래도 농구를 해야되는 아이인만큼 좀 더 컸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요즘은 190cm대 가드도 계속해서 나오는 등 사이즈적으로 장난아닌 친구들이 많잖아요. 첫째는 실력이겠지만 거기에 더해 신장까지 경쟁력을 갖추게되면 좋겠다는 생각은 농구하는 자녀를 둔 모든 부모가 마찬가지일거에요. 일단은 아들이 농구하는 것을 무척 좋아해요. 아빠 엄마가 모두 농구인이니까 아무래도 어릴 때부터 농구를 접할 기회가 많았고 그로인해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나 싶어요.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라요. 아장아장 걸어다니던 3살 때 미니농구골대에다가 공을 넣던 모습들요. 당시에 저는 진짜 ’아…, 내가 천재를 낳았구나‘싶었다니까요. 아시잖아요. 부모들 마음.(웃음) 초등학교 시절에는 즐기면서 하는 정도가 좋을 것 같아서 클럽농구를 보냈는데 본인이 거기에 만족하지못하고 너무 목말라해서 결국 3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하게 됐죠. 아직 어려서 나중에는 어떻게 성장할지 모르겠지만 현재 플레이 스타일은 동료들의 찬스를 봐주는 등 팀을 연결시켜주는 역할에 능한 듯 보여요. 패스 타이밍도 좋다는 얘기도 종종 들었고 정통 포인트가드에 가까운 색깔을 내지않나 싶습니다. 배워나가는 단계니까 이것저것 하다보면 자신에게 정말 잘맞는 옷을 입게 되겠죠. 스트레스 안받고 되도록 즐기면서 농구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가드지만 파워포워드 유영주 언니까지 막아봤습니다”

Q.농구는 어떤 계기로 시작하시게 된 것인가요?

스토리는 제가 제일 밋밋하지 않을까 싶어요. 다른 선수들 얘기들어보면 신체조건이 워낙 좋아서, 운동신경이 남달라서, 키는 작지만 정말 빨라서 등 나름 고개를 끄덕거리게 하는 요소들이 있거든요. 음…, 반면 저는 그냥 ‘어? 그것 뿐이야?’ 할 정도로 좀 싱겁다고 할까요. 친구따라 강남간다는 말이 있는데 저는 친구 대신 강남간 케이스에요. 저때는 초등학교 학생들이 무척 많았던 시절이에요. 저희 학교만해도 한학년에 10반 이상 있었으니까요. 당시 4학년정도되면 농구부 선생님이 오셔서 각반마다 뒷줄에 있던 아이들을 무작위로 지명해서 데려가는 경우가 많았어요. 다다익선이라고 신체조건 좋은 친구들 몽땅 데려가서 그가운데 원석을 발굴하는 방식이었죠. 아니라다들까 저때도 그렇게 했는데 당시 지목받았던 친구가 저랑 꽤 친했어요. 키는 컸지만 공부를 잘했고 공부에 관심이 많은 친구였죠. 키는 컸지만 운동은 별반 관심이 없더라고요. 그래서인지 가기 싫어했고 저에게 ‘대신 나가주면 안돼?’라고 부탁을 했어요. 친구가 간절하게 부탁하는 것이기도 했고 저 역시 뛰어노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기도해서 승낙하고 테스트를 보러갔죠. 솔직히 당시에는 그렇게 한번만 대타를 나가면 간단하게 끝날줄 알았어요. 하지만 그 한번이 한번이 아니게 되었고 선수를 거쳐 평생 농구인의 길을 걷게 됐네요.

Q.처음부터 포지션은 가드였나요?
그렇죠. 신장이 그렇게 큰 편이 아니라 골밑에서 활약할 입장은 아니었고 앞선에서 하는 농구를 하게됐죠. 그리고 어느 순간 돌아보니 너무도 자연스럽게 2번 슈팅가드를 하고 있는 거에요. 농구를 시작할 때처럼 큰 계기없이 물흐르듯 섞이면서 있다보니 제 몸에 맞는 옷을 입고있었던 것이죠. 일단 또래 중에서도 힘이 좀 있는 편이다보니 슛거리가 길었어요. 남들은 잘 쏘지않는 거리에서도 찬스가 난다싶으면 주저않고 던졌으니까요. 그러다보면 상대 수비가 저를 커버해야할 영역이 넓어지게 되고 또 그것을 역으로 이용해 드라이브 인을 시도하던가 어시스트를 뿌리곤 했죠. 하나의 확실한 장점이 있다는 것은 그래서 유리해요. 슛이 좋으면 단순히 슛만 쏠 수 있는게 아니에요. 그러한 부분을 활용해 다른 쪽에서까지 도움을 받거든요. 만약 제가 슛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다른 플레이에서까지 영향을 받아 경기력이 전체적으로 다운됐을 공산이 커요.

Q.슈터도 스타일이 다양하잖아요. 활동량을 많이 가져가면서 찬스를 만드는 타입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킬러처럼 힘을 한번에 몰아쓰는 유형도 있고요.
‘농구人터뷰’를 통해 소개됐던 여자 슈터들로 비교해보면 (이)강희 언니나 (김)영옥이가 적절한 비교가 될 것 같아요. 영옥이는 체형이 호리호리하고 발이 굉장히 빨랐어요. 이런 스타일은 무조건 장점인 스피드를 살리는게 맞습니다. 많이 뛰면서 상대 수비진을 어지럽히고 그런 가운데 외곽 슛과 돌파를 가져가면서 저격수 역할을 했죠. 반면 강희 언니는 힘이 좋아서 상대와 몸싸움을 잘했고 슈팅거리도 길었어요. 많이 움직이기보다는 순간적으로 힘을 폭발시킨다고 할까요. 선수들마다 고유의 색깔이 있어서 완전히 똑같다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저같은 경우는 강희언니와 좀더 흡사했던 것 같아요. 아, 그리고 몸 얘기하니까 생각나는데 (전)주원 언니도 몸이 되게 좋은 편이었어요. 테크니션 혹은 미녀 가드 그런 이미지 때문에 스피드좋은 테크니션만 연상하는 분들이 많으시겠지만 정작 언니의 최대 경쟁력은 탄탄한 몸에서 나오는 파워였다고 생각해요. 일단 매치업 상대에게 힘에서 안밀리니까 본인이 가진 기술을 다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죠. 가드였지만 수비시에는 센터까지 막는게 가능할 정도였으니까요.

Q.약간의 시대보정을 해도 172cm의 신장은 슈팅가드임을 감안했을 때 작은 키였던 것 같아요.
사실 그게요. 저는 은퇴한 뒤에야 제 키가 포지션 대비 작았구나하고 느끼고 있어요. 아들을 농구시키면서 키에 신경쓰다보니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농구선수가 아닌 키 큰 일반 여성들 중에서도 170cm넘어가는 분들 흔하지 않게 볼 수 있잖아요. 돌아보면 현역 시절 저보다 큰 선수는 많았지만 크게 불편함을 체감하지 못해서 그랬던 것 같아요. 공격에서야 제가 막 포스트업 치고 그런 것도 아니고 슈터였던지라 키보다는 슈팅 스킬이 더 중요했고요. 수비시에도 몸싸움에 자신이 있어서 어지간한 신장차이는 커버가 됐거든요. 대부분 말을 들어보면 ’아, 내가 너무 작아서 힘들구나‘하고 느낄 때가 수비시에요. 하지만 수비에서 평타 이상을 쳤으니까 아쉬움이 덜했나봐요. 몸싸움이 됐던 이유는 타고난 것보다는 엄청난 훈련량 덕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농구했던 분들은 아들 아실거에요. 그냥 팀에서 상당기간 버티고있는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검증은 끝난 상태였어요. 훈련 자체의 강도와 양이 대단했으니까요. 요즘에는 남녀의 차이 등 최소한으로 여성적인 부분을 감안하는 듯한 분위기지만 당시에는 달랐어요. 훈련량, 대하는 태도 등 성별자체는 아무 의미가 없고 그냥 운동선수 거기서 끝이었어요. 단체로 강제 삭발을 당한 적도 있으니까요. 지금같으면 인권 얘기까지 나올 상황이죠.(웃음)

 



Q.가드면서도 파워포워드 유영주를 수비한 적도 있다면서요?
자주는 아니었고 아주 가끔이었죠. 농구대잔치 서울은행 시절에는 팀에 장신자가 적었어요. 때문에 어떤 팀들을 만나면 매치업 자체가 힘들 때도 생겨났죠. 그나마 외곽에 있는 선수 중에는 제가 덩치가 있는 편이니까 어찌어찌해서 막게됐어요. 솔직히 (유)영주 언니 아시잖아요. 그냥 힘이 좋은게 아니라 같은 파워포워드 중에서도 탑급이었고 어지간한 센터를 상대로도 안밀렸어요. 거기에 골밑에서만 활동하는게 아닌 내외곽을 오가면서 활약하니까 골밑에 특화된 빅맨이 막기에는 또 까다로웠어요. 그러다보니까 외곽수비도 되고 어느 정도 체격도 있는 제가 막을 때가 있었죠. 물론 많이 힘들었습니다. 가드가 힘이 좋아봤자 파워포워드에 비할 수 있었겠어요. 파울도 하고 그러면서 꾸역꾸역 넘어갔죠.

“삼성갈뻔 했지만 현대로 가게됐죠”

Q.서울은행 소속이었는데 어떻게 현대로 가게된 것인가요?

농구대잔치 막판에는 IMF역풍으로 해체되는 팀이 많았어요. 특히 은행권 팀들이 줄줄이 무너졌는데 그래도 서울은행은 어느정도 버티는 분위기였죠. 그래서 다행이다고 생각했던 찰나 아니라다를까 서울은행도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선수들에게는 은행으로 발령도 내주고 나름 살길을 만들어줬죠. 저 역시 다른 동료들처럼 은행에서 일을 하게됐습니다. 하지만 평생 운동만해서 그런지 2개월 정도 다니는 기간동안 영 적응이 안되는거에요. ‘계속 은행 일을 해야되나?’ 그런 고민까지 들더라고요. 그러던 중 삼성에서 연락이 왔어요. ‘선수 생활 더 할 생각있냐?’고 물어오는데 와우 그 상황에서는 너무 고마울 뿐이었죠. 다시 선수로 뛴다는 것도 기쁘고 대기업 삼성에서 연락이 왔다는 것 또한 기분 좋은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삼성을 가는줄 알았는데 반전이 일어났어요. 나름 탄탄한줄 알았던 SK가 해체된 것입니다. 워낙 강팀인지라 영주언니, (정)선민이, (김)지윤이 등 좋은 선수들도 참 많았죠. 한명한명이 굵직한 대어급이었잖아요. 그러다보니 돈있는 팀에서 싹쓸어가면 형평성 문제가 생길 것 같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들려오면서 해체된 팀 선수들을 드래프트로 풀어버렸죠. 그로인해 운명이 바뀐 선수들이 많았는데 저 역시 그랬습니다. 원래 생각했던 삼성이 아닌 드래프트에서 현대에 지명되면서 예상치 못한 팀으로 가게 됐죠. 솔직히 슈터는 골밑 좋은 팀에서 더 빛이 나는 부분도 있거든요. (왕)수진이가 삼성에서 뛰면서 나름 편하게 외곽슛을 쏘는 것을 많이 봤어요. 골밑이 약한 팀의 슈터는 엄청 돌아다녀야되는데. 물론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입니다. 수진아 미안하다.(웃음) 그래서 삼성에서 한번 꼭 뛰어보고 싶기는 했지만 현대로 가서 신랑도 만나게되고 지금의 가정도 꾸린 것이니까…, 잘됐다고 봐야겠죠?(웃음) 운명이라는게 있나봐요.

Q.요즘 후배 슈터들 중에 눈에 들어오는 선수가 있을까요?
남자농구같은 경우 누구나 다 인정하는 전성현 선수는 그야말로 대세 슈터잖아요. 그냥 보기만해도 ‘와우’소리가 나와요. 슛 타이밍이 그야말로 예술이에요. 여자선수 중에는 강이슬이 정말 돋보여요. 누가봐도 잘하잖아요. 역대 여자농구 슈터들을 모두 소환해도 눈에 띌 것 같아요. 신체조건, 밸런스, 타이밍, 성공률 정말 모자람이 없는 선수가 아닐까싶어요. 저희때 슈터들의 경우는 중요한 순간 클러치슛을 성공시키면서 갈채를 받는 케이스도 있었지만, 일단 기본적으로 많이 던져서 일정 부분 득점을 가져간 경향이 컸다고 보거든요. 이슬이는 달라요. 그냥 성공률 자체가 남다른 것 같아요. 많은 분들이 역대급 슈터로 인정하는데 저도 한표 거들겠습니다. 슈터 출신으로서보면 더 대단하다니까요.

Q.예전 선수들 같은 경우 팀에 들어오자마자 핵심 전력이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요즘은 조금 시간이 걸리는 것 같아요. 거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죠. 하지만 지금 인터뷰는 개인적인 생각을 많이 얘기해도 되는 자리인지라 사견을 한번 꺼내놓겠습니다. 솔직히 농구 환경 자체는 엄청 좋아졌잖아요. 신체조건도 상향평준화되고 전술적인 부분도 많이 발전했고 훈련시스템 자체도 저희 때처럼 주먹구구가 아니에요. 어찌보면 더 잘해야 맞는데 현실은 국제경쟁력도 예전보다 떨어졌고 각 학교에서 날리던 루키들도 프로에 와서 적응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더라고요. 제 생각에는 훈련량의 차이도 큰 것 같아요. 예전에는 정말 훈련하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어찌보면 무식하게 보일 정도였는데 그만큼 얻는 것도 적지않았죠. 농구라는 스포츠에서 타고난 재능도 무시할 수 없겠으나 어차피 프로(실업)까지 올라온 선수급이라면 정도의 차이만있지 기본 재능은 다들 갖추고 있어요. 거기서 누가 더 간절하게 노력하고 많은 훈련량을 가져가느냐가 성패를 가르죠.

 



 

Q.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또 나때는’그런다고 받아들일 수도 있을 듯 싶어요. 요즘은 예전 얘기하면 ‘꼰대’라든지 ‘추억 보정’등의 말도 막 하잖아요.
그런 부분도 살짝 걱정은 되지만요.(웃음) 사실이니까요. 우리 때가 무조건 좋았다는 것이 아니라 팩트에요. 많은 훈련량은 육체와 정신도 강하게 하지만 기술이나 상황대처능력 등을 현저하게 끌어올려줘요. 예전에는 팀에 오자마자 즉시 전력으로 뛰는 선수가 많았어요. 이미 필요한 것들을 거의 배우고 갖춰서 데뷔하거든요. 지금은 프로에 와서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경우도 많다고 하더라고요. 어찌된 일일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훈련량, 경험 등에서 부족한 부분도 큰 듯 싶어요. 각 학교에서 예전처럼 엄청나게 훈련을 시키라는 소리가 아니에요. 본인이 부족한 것이 있다 싶으면 스스로 알아서 개인운동도 하고 여러 가지 방식으로 훈련량을 늘려나가라는 말이죠. 요새는 스킬트레이닝 교실도 있고 의지만 있으면 배울 데는 엄청 많잖아요. 거기에 의학, 재활프로그램 등도 잘되어있어서 더 체계적으로 훈련을 할 수 있 게 됐죠.

Q.지금 선수들도 기술은 좋잖아요.
맞아요. 적어도 기술적인 부분만 보면 지금 선수들이 더 나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기본기라고 할까요. 그런 부분에서 아쉬움이 좀 커요. 예전 선수들을 보면 실책이 많지 않아요. 속공 플레이같은 것 할 때 성공률도 높고요. 하지만 요즘 선수들을 보면 플레이는 화려하고 멋있는데 실책 혹은 실책에 가까운 플레이가 너무 많이 나오더라고요. 실책이 쏟아져 나오면 작전타임시 감독님들께서도 정신차리라고 야단도 치고 그러는 것 같은데, 그게 갑자기 정신이 확 차려지지도 않고 정신을 차린다고해도 잘 고쳐지기가 쉽지않아요. 이런저런 상황에 대한 경험이 부족하다보니 낯선 상황이 닥치면 자신도 모르게 허둥지둥되거든요. 그래서 무수한 훈련을 통해 기본적인 상황에서는 몸이 기억하게 해버리는게 중요한 것 같아요. 사람 몸은 정직해서 땀흘린만큼 움직인다고 생각합니다.

“농구인생에서 가장 슬펐던 순간은요…”

Q.프로 은퇴 후 김천시청에서도 잠시 뛰었어요.

아…,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 인생의 오점이죠. 김천시청이 싫고 잘못됐다는 것은 절대 아니에요. 나름 그때 성적도 좋았잖아요. 다만 ‘그렇게까지 뛰었어야 했나’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더라고요. 더불어 김천시청으로 가게 된 배경도 슬프고요. 저뿐 아니라 프로에서 뛰다가 갑자기 아마무대로 갔던 선수들은 다들 비슷할거에요. 당연한 것이겠지만 프로에서 아마로 가는 것인데 금전적인 부분이라던지 그런 부분은 대단할 것 없어요. 프로와 비교하면 소박하죠. 다만 원하지않게 프로에서 은퇴 수순에 몰리게되면 선수는 많이 많이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어요. ‘나는 아직 은퇴할 준비가 안되어 있는데, 내 몸은 이렇게 쌩쌩한데’라는 생각이 머릿 속에 가득하죠. 결국 저도 다른 어떤 이유보다 ‘농구나 실컷하자’라는 생각으로 김천시청을 가게된 것입니다. (김)영옥이같은 경우는 그런 과정을 거쳐서 중국에 갔다가 제2의 전성기까지 누리며 화려하게 은퇴했잖아요. 정말 그 정도면 대운을 타고난거죠. 노력도 정말 많이 했을 것이고요. 하지만 대부분은 영옥이처럼 마무리를 좋게 하지 못하고 농구공을 놓고 말아요.

 



Q.현대에서의 말년 선수 생활이 썩 만족스럽지 않았던 것이죠?
그랬죠. 농구에 대한 미련이 그렇게 많이 남았을 정도면요. 하지만 저도 나중에 감독을 하고 지난 시절을 돌아보니 이해가 되는 부분도 많았습니다. 팀을 이끄는 감독 입장에서는 노장 선수들은 어느 정도 안배를 해주면서 젊은 선수들을 키워야 되는 것이 참 난제거든요. 노장들이 천년만년 할 것도 아니고 어느 정도 상황에서는 식스맨 정도로 빠져주고 세대교체가 되는 것도 맞아요. 하지만 막상 그 상황을 맞게 되는 당사자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죠. ‘내가 그동안 해온게 있는데 왜 이런 취급을 받지? 나 아직 멀쩡한데’ 라는 등의 생각이 깊어지며 서운함만 커지기 일쑤입니다. 제가 그랬으니까요. 체력은 안되는데 출장시간이 줄어드는 것이 너무 속이 상했습니다. 물론 구단이나 감독님도 노장선수가 저런 생각이 덜 들도록 시간을 가지고 조절해 주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당한 경쟁을 통해 베테랑이 스스로 힘들겠다고 느끼게 해주는게 최고죠. 그럼 선수가 먼저 인정할테니까요. 하지만 갑자기 팀 체질개선한다고 확 바꿔버리거나 등을 떠밀다시피 하면 해당 선수는 생각에 앞서 자존심부터 다치니까 원활한 소통이 될 수가 없습니다.

Q.당시 팀에게 가장 아쉬웠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베테랑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였습니다. (박)명애만 놓고봐도 팀에서 너무 했다고 보거든요. 뭐 대단한 것을 바라지도 않아요. 팀에 이래저래 많이 공헌한 선수니까 조촐한 은퇴식 정도는 해줄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막 팬들 모아놓고 화려하게 하는 것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동안 함께 고생한 동료들, 프런트가 모여 밥이라도 한끼 같이 먹으면서 작은 패라도 하나 주고 ‘수고했다’는 따뜻한 말 한마디, 인정의 제스처가 그렇게 어려울까요? 팀에서 그정도 배려를 해주면 선수도 이전에 있었던 서운함 그런 것들은 다 털어버리고 홀가분하고 기분좋게 마무리할 수 있거든요. 이게 해당 선수에게만 좋은게 아니에요. 구단으로서는 ‘선수 대접해주는 팀’이라는 좋은 이미지도 쌓을 수 있고 지켜보는 후배들 입장에서도 ‘아 나도 잘해서 나중에 저렇게 은퇴식 할 수 있는 선수가 되어야겠다’는 일종의 동기부여가 될 수 있는거잖아요. 팀에 대한 충성도는 말할 것도 없고요. 일거양득이 아니라 일거삼득, 일거사득이 될 수 있는 좋은 방법인데 왜 그 어렵지도 않은 것에 그렇게 인색한지 모르겠더라고요. 명애는 정말 쭉 현대에서만 뛴 성골이에요. 그런 선수에게도 그렇게 밖에 안대했는데…, 지켜보는 제가 너무 실망스럽더라고요. 명애가 김천시청에 갔던 이유도, 현대에서 그리 상처를 받은 상태에서 ‘원없이 뛰어나보고 그만두자’라는 생각이 컸지않았나싶어요. 이래저래 회한이 많아보였습니다.

Q.정말 많은 노장선수들이 아름답지 못한 마무리에 상처를 받은 듯 싶어요.
그럼요. 나이가 먹고 싶어서 먹은 것도 아니고, 한때는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충성한 팀인데 그렇게밖에 취급을 안한다는 생각이 들때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대접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상처만 덜 줘도 아름다운 이별이 가능할텐데요. 명애가 그렇게 되는 것 보고 함께 은퇴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팀에서 잡더라고요. 조금만 더 뛰어달라고. 베테랑들이 우르르 한꺼번에 나가는 것도 모양새가 좋지 않아 보였나 보죠. 그래서 깊은 고민 끝에 1년을 더 뛰었지만 저 역시 마무리는 명애와 같았습니다. 노장이 되어서는 연봉협상 그런 것에서도 장난아니에요. 단순히 돈을 얼마를 주는게 문제가 아니라 자존감을 땅끝까지 끌어내려버리죠. 특히 농구대잔치 시절에서 프로로 넘어온 세대들…, 실업시절에는 어차피 월급제니까 의미가 덜할 수 있겠지만 프로는 말그대로 디테일이 지배하잖아요. 하지만 평생 농구만 해오던 저희들이 뭘 알겠습니까. 아무것도 몰라요. 이러쿵 저러쿵 얘기를 하면 이건 아니다싶어도 말빨로 이길 수가 없어요. 유창하게 이것저것 잘 알지도 못하는 부분까지 들이대면서 밀어붙일 경우 대부분 선수들은 꿀먹은 벙어리가 되고말아요. 저희가 농구만했지 언제 돈계산을 해보고 그랬겠어요. 배워본 적도 없고요. 그런 부분에서 정말 순수한 친구들인데 속만 답답하지 어떻게 말해야 될지도 모르고 눈만 꿈뻑거리는게 대부분이었습니다. 자기 주장 한번 펼쳐보지 못하고 고개만 푹 숙이고 돌아가는데 속은 갈가리 찢어지는거죠.

 



 

“선수들과 같이 행복한 지도자가 되고 싶어요”

Q.감독님같이 그런 아픔을 잘 알고 있는 분이 여성부 감독을 해도 잘할 것 같아요. 같은 여자로서 공감하는 부분도 많을 것 같고요.

일단 저만 놓고 생각해봐도…, 사실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죠. 장담할 수 없잖아요. 하지만 지금까지도 그때 그 심정을 잊지않고 있는 만큼 최소한의 배려는 하려는 마음입니다. 실제로 수원대학교에서 감독할 때도 경기에서 많이 못뛰는 선수를 배려하려고 했어요. 배려라는게 별것 없어요. 최소한의 자존심만 지켜주자는 것이죠. 선수들에 따라 약간 다르기는 했어요. 자존심을 건드려야 분발이 될 것 같은 선수는 조금 자극을 주기도 했고요. 아닌 경우에는 마음이 다치지않게 신경을 썼죠. 농구는 팀 스포츠잖아요. 코트에서 뛰는 선수들만 중요한게 아니에요. 분위기에 따라 팀의 사기도 달라지기 때문에 누구하나 소외되지 않고 함께 파이팅을 외치는것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특히 고참같은 경우 경기를 많이 못뛰면 의기소침 할 수 있는데 거기서 배려를 해주면 본인이 더 나서서 팀내 분위기도 이끌어주고 그래요.

Q.아참! 수원대학교에서는 어떻게 감독을 하시게 된 것인가요?
앞서서 잠깐 언급했지만 제가 남편이랑 함께 비영리단체를 운영하는게 있거든요. 여러 가지 일을 하는데 그중에서 해외 팀들이 국내에 들어올 경우 연습경기도 주선해주고 숙소, 차량문제 등까지 싹 맡아서 해주기도 하거든요. 한번은 중국에서 국내에 있는 대학교와 시합을 하고싶다고 연락이 왔어요. 중국으로 들어가서 하는 조건으로요. 수원대가 생각나서 당시 조성원감독님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좋다고해서 같이 중국으로 가게됐죠. 단순히 비행기만 타고가는게 아니라 여러 차편을 경유해야 되서 상당히 고생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되게 좋았던 것은 수원대 학생들의 자세였습니다. 젊고 에너지가 넘쳐서 그런지 몰라도 꽤 힘든 일정이었는데도 무척 밝고 즐거운 모습으로 함께했어요. 수원대에 대한 인상이 좋게 남을 수밖에 없었죠. 더불어 그때 전과정을 지켜봐주신 교수님이 계셨는데 저를 좋게 봐주셨더라고요. 그러다가 조성원 감독님이 프로로 가시고 사령탑에 결원이 생기게 됐는데 그 교수님이 저를 추천해주셨고 이런저런 검증절차를 거친후 감독을 맡게 됐었죠.



Q.감독으로서의 권은정은 어땠나요?
사실 지도자는 예전부터 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갑작스럽게 제의가 오니까 기쁘면서도 ‘내가 잘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도 됐어요. 이전에 초등학교 코치, 각종 캠프 코치 등 이것저것 가리지않고 해보기는 했지만 엘리트 쪽은 처음이었으니까요. 마침 당시 신랑이 여자프로팀 감독을 하고 있을 때라 이런저런 부분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신랑을 떠나 현직에 있는 감독에게 배울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좋은 기회였죠. 어쨌거나 당시 저의 눈에 비친 수원대는 선수들이 나쁜 팀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기술적인 수준들도 괜찮았어요. 다만 훈련량이 부족하다고 판단해서 훈련을 좀더 시키며 팀워크와 체력을 끌어올리는 한편 아무래도 학생들인지라 인성적인 부분에도 신경을 썼죠. 결과는 좋았어요. 가자마자 우승을 차지했으니까요. 이건 제 개인적인 소신이기도한데요. 저는 ‘내가 충족되어야 남도 충족 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있어요. 내 마음이나 컨디션부터 추슬러야 남도 챙기는 것이 가능해지죠. 꾹꾹 눌러담으며 싫은일 참고하다보면 결국 화내고 짜증내게 되잖아요.

Q.그 말씀인즉슨 선수들에게도 그런 마인드로 접근했다는 것이죠?
그럼요. 선수들에게도 그대로 했습니다. 대학생들이잖아요. 미팅을 나가든 술을 먹든 사생활적인 부분은 터치하지 않았어요. 다만 훈련만 정상적으로 소화하고 경기할 때 집중해서 잘해라. 사생활을 지적해서 선수들을 힘들게하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하지만 성인이고 운동선수인 이상 과정과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죠. 특히 과정! 농구에서 과정이 뭐겠어요. 정해진대로 훈련만 충실히 소화해도 무슨 큰 잘못을 저지르고 돌아다니지 않는 이상은 노터치인거죠. 제가 아까부터 훈련량 등을 워낙 강조해서 마치 전형적인 올드스쿨같지만 그것은 운동에 관한 부분일뿐이고요. 다른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나름 열렸답니다. 운동적인 부분 역시 선수들과 충분히 의견을 나누면서 소통을 할 수 있는 사람이고요. 더불어 역할 분업도 필요하겠더라고요. 제가 감독으로 갔을 때 선수가 15명이었는데 그중에 한명을 매니저 시켰어요. 학비 등 여러 가지를 면제해주는 조건으로요. 감독이 이것저것 다 하게되면 집중도 못하고 실수하는 부분도 생길 것 같더라고요. 감독인 저는 온전히 농구에만 집중할수있고 팀에도 매니저가 있다는 것은 분명 좋을 일이었죠. 더불어 수원대가 재활학과가 잘 되어 있는데 그쪽으로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농구부 친구들을 봐달라고 제의했어요. 한쪽에는 좋은 실습이 되고 한쪽은 좋은 케어를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윈윈이 될 것이라 판단했고 실제로도 그랬습니다. 그렇게 하나하나 퍼즐을 맞춰가다보니 주변에서 ‘프로팀 운영하는 것 같다’고 그러더라고요.(웃음)

Q.마지막으로 여전히 농구인 권은정을 응원해주는 팬들에게 인사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래전 선수인데 여전히 기억해주시는 팬분들께 너무 감사드려요. 수원대 감독 시절에도 기사가 나간 후 선수 권은정을 기억한다는 댓글을 읽고 가슴뭉클했던 기억도 납니다. 정말 많은 힘을 얻기도 했고요. 여전히 부족하지만 농구를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늘 한결같습니다. 어느자리에서나 노력하고 열심히 뛰는 농구인 권은정이 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본인제공, 홍기웅 기자
 

기사제공 점프볼

김종수 기자

 

, , , , , , , , , , , , , , , , , , , ,

0 Comments
번호 제목
+ 새글
State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