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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번째 시즌 보낸 ‘민트보스’ 한수지 “30살 은퇴가 목표였어요”

조아라유 0

 



GS칼텍스는 2022 순천·도드람컵 프로배구대회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리며 2020-2021시즌에 이어 다시 한번 트레블 도전에 나섰다. 아쉽게도 그 도전은 실패했다. 리그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5시즌 만에 봄 배구 진출 실패라는 성적표를 받았다. 하지만 GS칼텍스의 캡틴 ‘민트보스’ 한수지만큼은 빛났던 시즌이었다. 생애 처음 블로킹 부문 1위에 오르기도 했다.

2006-2007시즌 1라운드 1순위 세터로 GS칼텍스에 입단한 한수지는 V-리그에서 17시즌을 보내는 동안 포지션 변경, 건강상의 문제 등 여러 우여곡절을 겪었다. 한수지가 힘든 시간을 버텨낸 건 오직 ‘배구’를 위해서였다. <더스파이크>가 직접 만나 한수지가 걸어온 배구 인생을 [팩트체크]하며 돌아봤다.

더스파이크와 첫 번째 만남입니다. 섭외 요청을 받고 어땠나요.
사실 지난달(3월호)에도 섭외 요청이 온 걸로 알고 있어요. 그때는 우리가 자력으로 플레이오프 진출이 힘들어졌을 때 만나자는 요청이 들어온 거예요. <더스파이크>와 처음 하는 인터뷰라서 하고 싶었는데 당시 상황이랑 분위기가 정말 좋지 않았어요. 몇 시즌 동안 계속 성적이 좋았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힘들었거든요. 그래서 죄송했는데 다시 또 연락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팩트체크]가 어떤 인터뷰인지 알고 있나요.
아니요 잘 몰라요(웃음).

언니 스토커 한수지


인터뷰를 하면서 그동안 걸어온 길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긴 선수 생활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나 기록이 있다면.
기억에 남는 경기는 GS칼텍스에서 2020-2021시즌 트레블을 확정 지었던 마지막 경기가 생각나요. 3차전에서 이기면 끝나는데 그 경기가 5세트까지 간 거예요. 내가 그 시즌에 수술해서 많은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어요. 근데 감독님이 나를 5세트 선발로 넣으신 거예요. 걱정이 많았는데 다행히 이겨서 트레블을 달성했죠. 그 경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 것 같아요. (기억에 남는 기록도 있는지.) 지금 현재 진행 중입니다(웃음). (인터뷰 당시 한수지는 블로킹 1위를 달리고 있었고 결국 끝까지 유지하여 블로킹 부문 1위에 올랐다.)

배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언니가 초등학교 때 투포환 대회에 나갔다가 농구, 핸드볼, 배구까지 3개 종목에서 스카우트가 된 거예요. 언니가 그 가운데서 배구를 선택하고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어요. 근데 언니가 집에 없으니까 내가 너무 심심한 거예요. 그래서 ‘나도 언니 따라서 배구하고 싶다’고 엄마한테 졸라서 감독님을 만나러 갔어요. 당시 내가 키가 엄청 작았거든요. 그래서 걱정이었는데 감독님이 내 손이랑 발을 보시고 엄청 크니까 키도 크겠다 싶으셨대요. 그래서 배구를 시작하게 됐어요. (한수지의 언니는 한은지로 2005-2006시즌부터 2012-2013시즌까지 KGC인삼공사에서 활약했다.)

만약 언니가 배구가 아닌 다른 종목을 했어도 같이 했을까요.
그랬을 것 같아요. 어릴 때 거의 스토커처럼 언니를 따라다녔거든요(웃음). (다른 종목을 했어도 성공했을 것 같은지.) 내 남편이 농구 동호회를 다녀요. 그래서 가끔 따라가서 배우는데 동호회분들이 “너는 농구를 했어야 된다”라고 말하더라고요.

어렸을 때부터 운동신경이 있었나요.
없었던 건 아닌 것 같아요. 아빠가 키가 엄청 크신데 어렸을 때 운동을 했다고 들었어요. 근데 무슨 종목인지는 몰라요(웃음).

학창 시절에는 어떤 선수였나요.
난쟁이였어요(웃음). 초등학교 때 팀의 주장과는 머리 하나가 차이 날 만큼 작았어요.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키가 많이 컸죠. 나중에 알고 보니까 초등학교 감독님께서 내 키가 클 줄 알고 장신 세터를 시키려고 일부러 나를 세터로 키우셨대요.

근영여고 시절, 라이벌 팀이 있었나요.
한일전산여고요. 당시 한일전산여고에는 배유나(한국도로공사), 김재영이 있었어요. 근영여고 시절에 전국대회에서 3위 안에 들지 못한 적이 없어요. 근데 한일전산여고한테 져서 우승한 기억은 없는 것 같아요(웃음). 

도하에서 맞이한 프로 입단


2006-2007시즌 1라운드 1순위로 GS칼텍스에 입단했죠.
드래프트 당시 나는 국가대표에 뽑혀 도하 아시안게임에 출전하고 있어서 신인드래프트 현장에는 엄마가 갔어요(웃음). 덕분에 엄마가 GS칼텍스 옷 입고 사진 찍었죠. 그때 (김)연경 언니가 인터넷으로 신인드래프트를 지켜보다가 “너 GS칼텍스 간대”라고 말해줬어요(웃음).

어느덧 17번째 시즌을 보냈어요.
원래 30살에 은퇴하는 게 꿈이었어요. 지금은 빠르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어렸을 때는 그게 당연한 거였어요. 지금은 (정)대영 언니도 있고 (이)효희 코치님도 은퇴한지 얼마 안 됐고, (김)해란 언니도 아직 하고 있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28~30살 사이에 언니들이 은퇴했기 때문에 그게 당연한 건 줄 알았어요. 근데 목표를 넘어서 지금까지 하고 있네요.

아직은 은퇴 생각이 없을까요.
나도, 남편도 나이가 있어서 자녀 계획을 세워야 되기 때문에 고민 중에 있어요. 계획을 세워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미들블로커 한수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세터 출신이죠. 두 포지션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우선 세터는 상대를 속이고 공격수들이 편하게 공격할 수 있게 블로킹을 빼줄 때가 좋아요. 미들블로커는 블로킹이죠. 세터 시절 때 더 잘하고 싶어서 세터 언니들의 영상을 많이 봤어요. 그런데 나중에 미들블로커가 돼서 상대 코트에서 블로킹을 하려고 할 때 그 사람들의 패스 폼이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도움을 많이 받았죠. 지금도 받고 있고요.


데뷔 시즌을 돌아보자면요.
그때 아마 우리 팀이 8승 했을 거예요. 많이 부족했죠(웃음). 내가 신인왕을 받긴 했지만 내가 잘해서 받았다기보다 신인 선수 중에 유일하게 경기를 뛰어서 받은 거예요.

‘Remember Back A’


2006-2007시즌을 마치고 FA 보상 선수로 현대건설로 이적했어요.
한 시즌밖에 안 됐는데 팀을 떠난다니까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어요. 왜냐하면 GS칼텍스에 정을 붙였는데 또 다른 데로 가야 되는 게 당시 어린 마음에는 너무 힘들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막상 현대건설로 가서는 잘 지냈어요(웃음).

현대건설 시절 슬럼프에도 빠지는 등 어려움을 겪었어요. 그 안에서 성장한 게 있다면.
2009-2010시즌에 세터상을 받았는데 그때 감독님이 고(故) 황현주 감독님이셨어요. 감독님께도 많이 배웠고 양철호 코치님, 김우재 코치님도 내가 성장할 수 있게끔 많은 도움을 주셨어요.

2009-2010시즌 처음으로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게 그때 우리 팀에는 케니라는 외국인 선수가 있었어요. 이기면 정규리그 1위를 확정 지을 수 있는 경기에서 매치 포인트 상황이었는데 랠리가 엄청 길었어요. 근데 갑자기 케니가 아포짓인데 백A 속공을 달라는 거예요. 나도 놀라서 그냥 줘버렸어요(웃음). 그게 성공돼서 경기가 끝났고 우리가 1위를 확정 지었죠. 그리고 케니가 시즌 끝나고 콜롬비아로 돌아가기 전에 기념하게 사인해달라고 하니까 사인하고 밑에 ‘Remember Back A’라고 적어줬어요(웃음).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한 주전세터가 다음 시즌에는 KGC인삼공사로 이적하게 됩니다.
사실 곧바로 KGC인삼공사로 간 게 아니고 엮이고 엮여서 가게 됐죠(웃음). 두 번째 이적이라 괜찮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당시 KGC인삼공사에는 언니가 있었기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갔어요. (언니가 많은 도움을 줬나.) 언니가 나 때문에 힘들지 않았을까요(웃음). 내가 계속 따라다녔거든요.

2011-2012시즌 KGC인삼공사에서 처음으로 통합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사실 그 전해인 2010-2011시즌이 너무 힘들었어요. 왜냐면 2009-2010시즌 챔피언결정전 우승한 멤버에서 세터만 바뀌었는데 4위를 한 거예요. 무조건 내 탓이잖아요. 그래서 마음고생을 했는데 다음 시즌에 통합우승을 해서 다행이었어요. 마델레인 몬타뇨 카이세도가 정말 잘했어요. 그런데 내가 외국인 선수한테만 공을 잘 올리니까 다른 언니들도 힘들었을 거예요.

통합우승 이후 갑상선암이라는 진단을 받았죠.
그때는 나보다 트레이너 선생님이 더 못 받아들였어요. 많이 충격이었나 봐요. 차를 타고 숙소에 가는 데 길을 잘못 들어서 다른 데로 가고 그랬어요. 물론 나도 충격이었죠. 그래서 친구 아버님 중에 의사 선생님이 계셔서 ‘시즌 끝나고 수술하면 어떻게 되는지’ 여쭤보기도 했는데 너무 단호하게 ‘안 된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바로 수술하고 집에서 쉬다가 다시 운동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숨도 잘 못 쉬니까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그런데도 이성희 감독님께서 기다려주셨어요. 그래서 다시 선수생활을 할 수 있었죠.

암수술을 받고 다시 운동하기는 쉽지 않은 일인데, 다시 돌아오기로 마음먹은 이유가 있는지.
그냥 당연히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왜 그런지 이유는 모르겠는데 운동을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고 구단과 이성희 감독님께서 기다려주시니까 당연히 돌아가야 한다고만 생각했어요.

2016-2017시즌에는 마침내 포지션 변경을 합니다.
처음에는 이성희 감독님께서 “(건강 문제로 세터는)힘드니까 미들블로커를 하면 중간중간 쉴 수 있으니 해볼래?”라고 말씀하셨어요. 당시 우리 팀 미들블로커에는 쟁쟁한 선수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내가 지금부터 해서 그 선수들을 이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일단 세터가 더 재밌었어요. 계속 토스가 하고 싶었고요. 그래서 그때는 ‘세터를 계속하겠다’고 말씀드렸죠. 그리고 얼마 뒤에 서남원 감독님이 새로 오셨어요. 당시 팀에 나와 (이)재은 언니가 세터로 있었는데 같이 잘했으면 좋았겠지만 한 명이 잘하면 다른 한 명이 흔들렸고 같이 잘하는 날이 없었어요. 그런 상황이 많다 보니 서남원 감독님께서 둘 중 한 명을 트레이드 시켜야겠다고 하셨어요. 근데 그 과정에서 다른 팀이랑 잘 안됐나 봐요. 그래서 저를 미들블로커로 변경시키셨어요.

만약 계속 세터를 했다면 지금까지 선수 생활을 했을까요.
지금까지 했어도 주전 세터까지는 못 하고 경기 도중에 블로킹만 하러 들어갔을 것 같아요.

포지션 변경 과정에서 힘들었던 점은.

그냥 재밌었어요(웃음). 그때는 아포짓에서 공격도 했는데 내가 공격하면 득점이 되니까 우리 팀 선수들도 재밌었나 봐요. 그래서 이단 토스도 다 나한테 주는 거예요. 그럼 나는 또 신나서 계속 공격했어요. 아웃사이드 히터도 해봤는데 처음에는 잘 되니까 재밌더라고요. 근데 두 번째 경기부터는 잘 안돼서 감독님한테 ‘아웃사이드 히터는 못 하겠다’고 말씀드렸어요. 



 



의사 선생님도 챔피언결정전 앞둔
한수지를 말릴 수 없었다



2019-2020시즌에는 다시 친정팀 GS칼텍스로 복귀합니다.
내가 집이 대전인데 집이랑 너무 멀어졌다고 생각했어요(웃음). KGC인삼공사에서는 주장이었는데 GS칼텍스에 와서는 (김)유리와 (이)소영이가 주장을 했으니까 편했어요. (이번 시즌은 주장이었는데.) 주장이면 확실히 신경 쓸 게 많아요. 모든 선수를 신경 써주지 못하니까 그것도 미안하죠.

가평에 지은 GS칼텍스의 새 숙소를 처음 봤을 때 어땠나요.
운동만 하라고 만든 곳이에요(웃음). 여기는 택시도 잘 안 잡히고 배달도 5만 원 넘게 시켜야 와요. (차상현 감독과 함께 낚시는 안 하는지.) 처음에는 감독님 따라서 했는데 재밌는 거예요. 나도 몰랐는데 3~4시간 동안 앉아서 물과 찌를 보고 있는 걸 좋아하더라고요(웃음). 그런데 문제는 내가 지렁이를 못 껴요. 옆에서 도와줘야 해요. 그리고 물고기를 잡아도 빼지를 못해요. 결국 나는 낚시대를 던지기만 하는 거죠. 한 번은 엄청 큰 물고기를 잡았어요. 그런데 누가 와서 뜰채로 물고기를 들어줘야 하는데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물고기가 도망갔어요. 관계자분들도 놀랄 정도의 큰 물고기였는데 아쉬워요(웃음).

6라운드 도중에 조기종료한 2019-2020시즌은 현대건설과 양강 체제를 이루었죠.
챔피언결정전이 열렸으면 재밌었을 것 같아요. 우리도, 현대건설도 멤버가 좋았거든요. 그래도 현대건설이 더 아쉽지 않을까요. 1점 차이긴 하지만 리그 1위를 하고 있었으니까요.

2020-2021시즌에는 3라운드 중반에 수술을 받았어요.
그때도 블로킹 1위 하고 있었는데… 사실 발목이 워낙 안 좋아서 병원에 갔는데 의사 선생님께서 ‘끊어질 것 같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진짜 며칠 뒤에 외발로 착지하다가 발목 인대가 끊어졌어요. 병원에 갔는데 ‘수술하기에는 인대가 조금 남아있다’고 해서 수술을 못 했어요. 그 상태에서 훈련하는데 블로킹하고 착지할 때 너무 아픈 거예요. 그 때는 정말 안 될 것 같아서 감독님한테 말씀드렸더니 감독님께서 ‘어떻게 하고 싶냐’고 선택지를 주시더라고요. 나는 팀 성적도 아쉽고 내 개인 성적도 너무 아쉽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수술하겠다’고 하고 결국 수술했죠.

복귀전이 흥국생명과의 챔피언결정전 2차전이었죠.
무리해서 복귀한 거죠. 당시 의사 선생님이 까치발을 들면 안 된대요. 그런데 까치발을 안 들고 점프를 어떻게 해요(웃음). 그래서 의사 선생님을 설득했어요. ‘까치발 들 수 없게 발목을 잡아주는 장비가 있는데 이걸 차고 하면 괜찮을 것 같다’고 했죠. 수술해준 의사 선생님과 재활을 담당해준 선생님이 걱정하시더라고요. 그래도 다른 상황이면 절대 안 된다고 하셨을 것 같은데 ‘챔피언결정전이니까 한번 해보라’고 하셨어요.

챔피언결정전 끝나고 의사 선생님이 뭐라고 하셨나요.
혼났죠(웃음). 의사 선생님도 내가 받은 수술을 5명 정도밖에 안 해봤대요. 그래서 더 걱정하셨던 것 같아요.

결국 챔피언결정전에서 우승하면서 트레블을 달성했습니다.
‘이런 것도 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자부 최초이다 보니까 감격스러웠고요. 여자부 최초의 트레블을 한 멤버의 일원이라는 게 자랑스럽습니다.

이제는 국가대표팀 얘기를 해보죠. 고등학생으로 2006도하 아시안게임에 다녀왔는데 어땠나요.
(배)유나랑 같이 언니들 뒷바라지했죠. 근데 유나는 성격이 차분한 스타일이고 나는 급한 스타일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유나가 뭘 하려고 하면 내가 벌써 다 끝내놨어요. 아마 유나는 편했을 거예요(웃음). 당시 대표팀에서 언니들 배구하는 것만 봐도 충격이었어요. 내가 해왔던 배구와는 공 때리는 파워도 다르고 각도도 달랐어요. 정말 신세계였어요.

2022년에는 세계선수권에도 다녀왔죠.
그때는 대체 발탁으로 급하게 들어가서 다른 선수들을 위해 뭘 해줄 수 있을까, 무슨 역할을 할 수 있을까만 생각했어요. 튀르키예 미들블로커 에다 에르뎀을 실제로 보니까 정말 잘하더라고요.

예전의 세계배구와 최근 세계배구를 직접 겪으면서 변화를 느끼나요.
예전보다 훨씬 빨라졌어요. 만약 유럽 선수들까지 스피드 배구를 도입하면 아시아권은 성적을 내기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공인구가 다르니까 더 힘들어요. 우리가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서는 볼 컨트롤이 돼야 해요. 그런데 공이 아무리 비슷하게 만들어졌다고 해도 분명 다른 공이에요. 하라고 하면 할 수는 있지만 공을 세밀하게 다루기까지 시간이 필요해요. 우리는 한 달 동안 볼 적응만 하다가 끝나는 거죠. 확실히 문제인 것 같아요.

슬슬 인터뷰를 마무리해 보려 합니다. 그동안 걸어온 배구 인생을 돌아봤는데 어땠나요.
많은 일이 있었고 그야말로 파란만장하지 않았나 싶어요. 언제 은퇴할지 모르겠지만 그때까지는 더 이상 별 탈 없이 잘 마무리됐으면 좋겠습니다.

배구선수 한수지가 아닌 사람 한수지의 목표가 궁금합니다.
잘 먹고 잘살고 싶습니다(웃음).

글. 박혜성 기자

사진. 박상혁 기자

(본 기사는 <더스파이크> 4월호에 게재되었음을 알립니다.)

기사제공 더 스파이크

박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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