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평화적 ‘촛불’이 정권 몰아내면 한국 민주주의에 큰 획”
ㆍ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 대담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82)과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73)가 30일 경향신문에서 마주했다. 두 원로의 대담은 처음이라고 했다. 대화 테이블엔 ‘피의자 대통령’의 진퇴가 국회와 검찰 손에 쥐여 있는 혼미한 대한민국이 놓였다. 두 사람은 전날 박근혜 대통령의 3차 담화에 대해 “과오를 반성하지 않고 문제를 국회에 떠넘긴 정치술수”라고 혹평했다. 나아가 “시민사회가 권력을 사유화하고 농단한 현직 대통령을 평화적으로 교체하는 것은 민주주의와 헌정사에 큰 획을 긋는 일”이라면서 ‘포스트 박근혜’ 시대는 정경유착 탈피에서 시작돼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대통령 퇴진 방식으로 남 전 장관은 “즉각 하야”를, 최 명예교수는 “국회 탄핵”을 주장했다. 두 원로의 대담은 이날 오전 11시부터 경향신문사 5층 접견실에서 이기수 사회에디터 사회로 2시간 동안 진행됐다.
- 박 대통령이 29일 ‘임기 단축을 포함해 국회 결정에 따라 물러나겠다’는 세 번째 담화를 했다. 어떻게 봤는가.
남재희 = TV 보고 두 가지를 느꼈다. 첫째는 자기 과오에 대한 시인이 약했다. 오로지 나라를 위해 했고 주변에서 잘못했다는 거 아닌가. 자기가 잘못한 게 없다는 데 일단 실망이다. 그리고 국회로 떠넘긴 거다. 국회라는 게 본래 여야 합의가 어려운 곳이다. 박 대통령 자신이 3분의 1 이상 결정지분을 갖고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이다. 야당에서 꼼수라고 했는데, 국민들의 시위를 진정시키고 눈을 돌려버리는 것도 있다. 하야하지 않았는데 민중들은 하야하는 것처럼 오해할 수도 있다. 조조가 꾸며냈는지 몰라도 대단히 고도로 책임을 전가하는 정치술책으로 보인다. 대통령 주변에 꾀보가 있는 것 같다.
최장집 = 국회에 결정을 넘긴 것 자체는 탄핵을 할 수도 있고 특별한 문제는 못 느낀다. 나 역시 과오에 대해 잘못이 없고 순수하게 국가를 위해 했다는 건 이해·수용할 수 없는 말이다. 박 대통령의 최순실 국정농단 조서에 나와 있는데…. (담화는) 민주주의 원리·규범에 정면으로 배치된단 생각이 든다. 왜 민주 규범과 충돌하냐면, 루이 14세가 말했듯이 ‘내가 곧 국가’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면 설명이 안된다. 민주주의는 선출된 대통령이라 해도 국민 의사에 따르는 거고, 자기를 선출한 사람들에게 책임져야 하고 법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박 대통령 스스로 법으로부터 초월해 있다는 느낌이다. 잘못 없다면서 국회에 맡기는 것도 앞뒤가 안 맞고 정치적인 술수가 느껴진다.
- 찔끔찔끔 물러서는 세 번의 담화에 여론도 좋지 않다. 대통령의 권위와 신뢰가 무너지고, 국정운영 에너지는 소진됐다. 어쩌다 이런 상황이 왔다고 보는가.
남재희 = 일부에선 1987년 체제에 문제가 있다고 왜곡한다. 완벽한 건 아니지만 87체제 문제가 아니고, 아버지·어머니는 총맞아 죽고 목사인지 승려인지 경찰인지 모를 사람에게 세뇌된 박 대통령의 정신병리학적 현상이다. 그로 인한 범죄고…. 그 현상을 갖다가 일부 음모꾼·장난꾼들이 87체제의 과오로 전가하고 개헌으로 몰아가고 있다. 헌법이 ‘나는 억울하다’고 울어야 한다.
최장집 = 두 차원이 있다고 본다. 박 대통령의 특별한 성격이나 성장환경, 민주주의를 대하는 방식이나 주변의 영향까지 개인적인 요소가 있다. 제도적으로는, 어떻게 개인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이 엄청난 공적 권력을 행사하는데 그것이 사적인 특수 인간관계의 영향을 받아 사익을 추구하는 양상으로 나왔는가 하는 문제가 크다.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장관들한테 ‘그래도 날 만나고 싶으냐’고 질문하는 걸 보고 굉장히 놀랐다. 필요하면 둘이 만나고, 내부에서의 대화가 중요하다. 대통령이 정당과 소통 안 하는 건 둘째치고, 장관과도 소통 안 하는 상황이지 않나. 애당초 통치할 수 없는 구조를 만들었고, 좁은 공간 안에서 스스로를 단절시키고, 사적으로 자연스레 최순실이 드나든 거잖나. 그렇게 되면 정부의 공적구조는 공동화되고 공사관계가 구분이 안되는 거다.
남재희 = 두 가지 측면을 지적하고 싶다. 하나는 기본적으로 박 대통령이 직접 얘기하면 실력 없는 게 드러나니까 서면보고 받고, 아는지 모르는지 사인만 하는 거다. 옛날에 해보면, 대면보고는 (대통령도) 어지간히 알아야 되는데, 실력차가 너무 나고 모르면 보고를 받을 수가 없다. 사회적인 지식이나 지적 수준이 대등한 대화가 불가능한 게 아니냐고 보는 거고. 또 하나는 어렸을 적부터 청와대에서 자라서 프린세스(공주) 의식이 있고, 요승부터 딸 최순실까지 이어지면서 연달아 사교에 빠진 거다.
- 박 대통령의 담화와 촛불 민심은 여전히 간극이 크다. 촛불은 즉각 하야하라는데, 대통령은 국회 합의로 질서 있게 퇴진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한국 정치가 제대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인가.
남재희 = 국회를 중심으로 한 정당정치는 어느 정도 혼란스럽게 마련이다. 군대같이 질서정연하게 가는 걸 기대하긴 어렵고…. 허용할 수 있는 혼란이냐, 묵과할 수 없는 혼란이냐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정치의식 고양이 필요하다. 그걸 약간만 혼란이 오면 일부 언론이나 정치권에서 매도한다. 민주주의 결정에서 중요한 것은 국회 표결이거나 국민투표 아닌가. 이번 담화는 있을 수 있는 혼란임에도 (청와대가) 몰아붙여서 자기 정권을 연장하려는 계략이 숨어 있다.
최장집 = 국회에서 필요한 사안이 있을 때 정당끼리 제대로 협력하고 반응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 게 사실이지만, 현재까지는 그런대로 잘 대처해 나가고 있다고 본다. 압도적인 시민들의 요구가 있기 때문에, 조그만 정치적인 술수랄까 이런 게 통할 환경은 아니다. 갈 길이 정해졌고, 그렇게 가도록 만드는 힘에 의해 가기 때문에 야권 3당이 협력을 통해 절차적으로 잘 밟아나가면 큰 문제는 없다고 본다.
- 대통령이 국회에 공을 넘겼는데 ‘질서 있는 퇴진’에는 탄핵도, 모든 걸 내려놓는 2선 후퇴도 포함된다. 당장 스스로 물러날 생각은 없다고 밝힌 것이고, 어떤 방식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나.
남재희 = 박 대통령은 대한민국 헌정사상 가장 추악한 범죄의 공모자, 아니 주범이다. 주범이면, 이 정도 국민이 항의하고 국제적으로도 부각되면 당장 하야해야 된다. 그래도 아무 문제 없다. 여야 합의로 총리 임명? 필요 없다. 황교안 총리에게 맡겨놔도 법에 없는 짓 장난 못 치고 음모 꾸밀 수 없다. 이승만이 허정 외무장관에게 넘겼을 때 아무 문제 없이 석 달 만에 2공화국 탄생시켰다. 이승만도 망명했지 않나. 박 대통령도 당장 하야하고 어떻게 보면 망명을 시켜줘도 된다. 옛날 자유당 땐 야당에 신익희라고 국민들의 의지처가 있었다. 노태우 때는 김영삼·김대중이라는 거물과 선택권이 있어 국민이 안심했다. 지금은 신익희나 양김 같은 대체인물이 안 보여 약간의 혼선은 있겠지만, 무난하게 사태가 수습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최장집 = 국회는 당연히 탄핵 외엔 다른 방법이 없다. 탄핵이 좋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대통령은 직무정지된다. 황교안 총리가 권한대행 되는 것도 괜찮다는 남 전 장관 의견에 동감한다. 촛불과 온 국민이 바라고 있는 방향에서 벗어나서 황교안이 자신의 의리를 찾을 거라 절대 보지 않는다. 야 3당이 절차대로 법에 따라서 탄핵하는 게 옳다.
남재희 = 탄핵은 시간이 너무 걸린다. 3차 담화도 이른바 탄핵 쪽으로 움직이는 비박의 혼선을 노리는 거 아닌가. 하야해도 대선으로 가는 데 큰 문제 없다.
최장집 = 대선 스케줄은 정당이 합의하면 된다. 여름 정도까지만 해도, 조기대선을 하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대선은 8월 정도? 너무 빨라도 그렇고 그 정도 해서 대선 국면에 들어가면 되지 않을까. 나는 시간이 걸려도 탄핵을 통하는 게 좋다고 본다. 대통령이 너무나 분명한 범죄의 중심에 있을 때, 법적으로 철저히 안된다는 걸 국회가 결의하는 게 중요한 경험이 된다.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도 그렇다.
- 국정공백이 현실이 됐다. ‘박근혜표 정책’은 탄핵되면 서는 것인가.
남재희 = 공백 얘기했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있다. 최순실 게이트가 폭로되고 국민들이 알게 되면서 박근혜는 끝났다. 좀비가 된 거다. 이미 국정공백은 시작됐다. 박 대통령이 국제외교에서 어떻게 협상을 하겠는가. 시진핑이나 아베, 트럼프와 무슨 안보협상을 하겠나. 양보나 하면 모를까. 대통령이 법률적으로 유지하고 있으니까 형식논리는 되는데, 국민이 대통령이라 인정 안 하면 그게 지금 공백인 것이다. 빨리 끝내려면 하야밖에 없다.
최장집 = 박 대통령의 도덕적 권위와 정치적 권한행사는 사실상 끝났다. 박 대통령의 핵심 정책들은 중단돼야 한다. 다음 정권이나 국회에서 심의해서 가야 한다. 지금 기본 정책에서, 국정교과서와 노동시장 개혁, 남북 문제까지 세 분야는 중단돼야 한다. 이미 촛불을 통해서 구체적으로는 아니더라도, 단지 스캔들 규탄뿐 아니라 민주화 이후 누적돼온 국가의 역할이나 정책에 대한 문제제기가 많았다. 세월호 포함해서…. 그렇게 누적되고 민주주의 잘못해 피폐해진 문제들이 표출되는 것이지, 뭐 하나를 두고 반대하는 건 아니다. 지금은 폭력 없이 사람들이 신중하고 사려 깊어진 것 아닌가. 그게 이번 촛불의 가장 큰 특징이다. 국정교과서는 내용도 문제지만, 한창 자유로이 생각하고 창의성을 키워야 할 세계화된 환경에서 젊은 학생들에게 획일적으로 국정을 통해 학습시키는 거 자체가 문제다. 노동시장 유연화 자체는 세계화 경제질서에서는 일리도 있다고 보나, 우리는 최소한 노동하는 사람들의 인권과 민주적 권리 자체를 억압하거나 무시하는 결정은 안된다고 본다.
남재희 = 조크를 하나 넣어볼까. 박근혜 정책을 조크로 얘기하면, 노동 탄압의 강도를 높이고, 노동자의 불이익을 강요하고, 반사적으로 재벌 기업에는 이득을 준 것이다. 그리고 재벌에서 삥땅을 뜯고 그거 아닌가.
최장집 = 대북정책도 전환이 돼야 한다. ‘통일대박’이나 힘으로 굴복시키고, 흡수통일한다 이런 거는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고, 무력충돌이든 국지전이든 유발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에 최첨단 무기나 사드를 들여오는 것도 대북 강경정책과 연결돼 있다.
남재희 = 지금 남북이 전쟁을 하면 안된다. 서로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는다. 통일대박이 뭔가. 주술적인 용어다. 개성공단 폐쇄나 모든 거를 극한적으로 몰고 가고 있다. 극단적으로 해서 해결되면 또 모른다. 중국이 있는 이상 안된다는 거다. 상당히 위험하고 위태위태한 상황으로 갈 수 있다.
- 5번의 큰 촛불집회가 있었다. 190만명이 나와서 연행자는 0명, 세계에서도 민주주의의 새로운 지평이나 모델로 주목하고 있다. 불붙은 주권자들의 참여 열기를 어떻게 수렴해갈지 숙제도 주어졌다. 시민권력이 확장되어가는 것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가.
남재희 = 촛불은 지금 잘하고 있다. 촛불을 어떻게 볼지 정치학자들의 중요한 과제가 됐다.
최장집 = 박근혜·최순실 사태가 굉장한 촛불시위를 야기했고, 대규모 참여가 민주주의 지평을 연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 도입 후 30년 동안, 민주주의를 처음 해보면서 여러 문제점을 경험한 것이 이런 기회를 통해서 앞으로 민주주의를 제대로 해야겠다는 각오나 관심이 높아지는 계기가 된 거다. 이것이 일단 기존 정당체제에도 큰 영향을 주고 변화를 촉발시킬 수 있다. 한국이 지금 민주적 제도를 통해 대표돼야 할 요구들이 억제되고, 사회경제적 이익을 중심으로 모인 자유적 결사체가 약하다. 촛불이 정치참여를 확대시키고, 자유적 결사체도 많아졌으면 하는 생각이다. 촛불이 앞으로 대선 과정에서도 그걸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남재희 = 이번 상황을 보면, 탐사보도가 중요한 기능을 했다. 언론매체가 총동원돼 시민혁명에 선봉적인 역할을 했다. 수구 언론마저 동조하는 분위기가 되고, 종편도 역기능이 아닌 순기능을 했단 걸 일단 강조하고 싶다. 그동안 시민운동이 약화됐었다. 그런데 이번 촛불을 계기로 시민운동이 활성화되고, 시민단체가 제 역할을 하는 중요한 모멘트가 될 거 아닌가. 앞으로 대선까지도 시민단체의 역할이 커질 거라 본다.
최장집 = 이번 촛불시위에서 임기가 절차적으로 계속되고 있음에도 현직 대통령을 평화적인 방식으로 퇴임시키는 건 의미 있게 평가될 일이다. 과거엔 이런 일은 폭력이 동반됐다. 군부가 동원되거나 대규모 무력충돌로 다쳤잖나. 이번 사태는 엄청난 수의 군중들의 뜻과 요구가 표출돼 평화적으로 현직 대통령을 교체하는 민주주의의 힘과 해결 방식을 보여준 것이다.
- 대통령이 3차 담화에서 직접 거론하지 않았어도, ‘임기 단축 포함해 퇴진 문제’라고 하면서 개헌 논쟁이 일 조짐도 보인다. 정계개편 변수도 될 수 있는데, 대통령 퇴진과 대선 앞의 개헌 얘기는 어떻게 보는가.
남재희 = 지금 개헌 얘기하는 사람은 불난 집에서 밤 구워먹자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87체제의 문제가 아니고 박근혜의 문제다. 왜 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 대통령 때는 체제 문제가 안 나오다 이번에 체제 결함론이 나오느냐. 그건 박근혜의 과오를 호도하고 체제 문제로 희석시키려는 저의가 있는 거다. 속 보이는 개헌 책략은 버려야 한다. 지금 대권 도전에 미달한 사람들이 권력분산형으로, 제3지대 어쩌고 하면서 자기들도 대권에 참여하려는 욕심이 있는 것이고…. 개헌론자들이 대권주자의 약간 미달자들이다. 대권 레벨에 선 사람들은 그런 얘기 안 한다. 우리나라에 지금 정치낭인이 너무 많다.
최장집 = 전적으로 동감한다. 박근혜 문제에 개헌 문제가 섞이면 안된다. 어제 담화는 임기 단축은 개헌을 통해서 하자는 걸 암묵적으로 깔고 있고, 그런 의도가 노출됐다고 볼 수 있다. 지금은 탄핵 절차를 통해 대통령 퇴진에 집중하면 된다. 개헌 문제는 굉장히 쉽다고 보는데, 일단 대통령 문제를 처리하고 개헌은 다음 정부에서 필요하면 하는 게 맞다. 지금은 사람들도 즉각적 대응밖에 못하게 되고, 개헌 내용도 부실해질 수밖에 없다. 어떤 제도적 결함이 있는지, 박 대통령을 통해서 알게 된 것도 있고, 사회경제적 이슈나 요구를 어떻게 대표할지도 논의를 좁혀서 다음 정부에서 하는 게 맞다. 개헌 문제가 이 과정에서 들어오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 보수의 위기인가.
최장집 = 그렇다. 이 결과는 개인의 문제라고만 보지 않는다. 이제 박근혜 이후의 정치와 국가운영 내용, 정당 간 경쟁의 기본 틀도 변할 수밖에 없다.
그동안 한국 정치를 움직여온 건 박정희 모델, 박정희 패러다임이다. 다 아시다시피 1960~70년대 산업화, 국가가 재벌과 동맹해서 관치경제로 끌어오고, 노동 문제가 그 짝이 돼서 노동자의 권리가 억압되고 노동은 배제돼오지 않았나. 이걸 보수정당이 위에서 헤게모니 잡고 정치를 이끌어왔고, 야당은 국가운영의 대안적인 방식 설정을 하지 못하고 반대하는 역할을 한 거다. 대안적 모델을 갖고 경쟁한 것은 아니다. 이번 박 대통령 문제는 초기 산업화 단계에선 유용했을지 모를 아버지 모델을 민주화 이후의 세계화된 사회에서 시대착오적으로 유지한 것이다. 박 대통령이 정치를 경험한 것이 유신 때이고, 그것이 그 사람의 정치관 형성에 중요한 요소가 됐다. 유신 체제의 운영 방식과 대통령관이 변형된 방식으로 지금 재현된 게 국정교과서 아니냐. 사적 이해관계가 공적 권력으로 구현되는 것도 옛 권위주의 시대를 그대로 닮았다.
- 박정희 패러다임은 한 축이 권위주의, 또 한 축은 국가·재벌 동맹체라고 규정하고 야당이 지금까지 대안적 모델은 안됐다고 평가했다. 여야의 간극이 남북 문제에선 갈리는데, 재벌 문제나 노동 문제 대응에선 차이가 크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민영화된 KT나 포스코는 최순실 게이트에서 여전히 대통령과 권력의 안마당이었다. 해법이 있는가.
최장집 = 박정희 모델의 핵심이 국가 주도의 산업화다. 온 한국 사회·경제를 디자인하고 정책 목표를 정하는 속에서 관치경제와 정경유착이라는 게 형성됐다. 이 고리가 끊어져야 하고, 기업들에 자율성을 더 보장하는 게 필요하다. 그동안 전경련은 정경유착 고리 역할을 해왔고, 이번에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관과 경이 합쳐진, 말만 사용자단체지 세계적으로도 정경유착이 제도화된 유례없는 단체다. 정부 공기업도 들어가 있는 것 아닌가. 기업지배 국가도 아니고, 전경련은 해체하는 게 맞다. 대기업 이익집단은 자율적 결사체로 새로 만들어져야 한다.
남재희 = 우리 사회는 재벌-정당-관료-검찰-언론이 지배계급을 이루는 복합체다. 예전엔 중앙정보부가 끼었다가 빠지고, 쿠데타 하면 군부도 끼어들어갔다. 우리나라를 지배하면서 국민과 유리되고, 민주 원칙에도 어긋난 복합체는 별도 테마로 몇 시간이라도 심층토론을 할 문제다.
- 내년은 대통령을 직선제로 뽑은 지 30년, 외환위기 20년, 보수정부 10년을 맞는 해다. 박 대통령의 국정문란을 박정희 시대의 종언이라고 규정하려는 사람도 있고, 도올 김용옥 선생은 해방 이후 쌓인 적폐들을 근본적으로 돌아볼 때라고 했다. 박근혜 이후, 새로운 대한민국의 방향과 핵심과제는 어떤 것인가.
남재희 = 어려운 얘기다. 새로운 사회를 모색해야 된다. 박정희 체제는 심플하게 말하면 가짜 만주체제다. 기시 노부스케의 만주국을 배워 온 것이고 그걸 발전시킨 것이다. 짧은 기간 자본축적 방식으로는 민주주의는 안될지라도 그만한 게 없다고 본 거다.
그건 이미 탈피했고, 새로운 사회를 모색해야 하는데, 새 사회가 어디 따로 있는가. 흔히 장기적 안목으로는 유러피안 모델을 얘기한다. 노르딕 모델, 독일 모델, 영국 모델 하는데 서로 다르다. 광범위하게 유러피안 모델이라고 하는데, 방향은 그쪽이다. 그러려면 제도적인 뒷받침은 비례대표다. 그렇지 않으면 49%가 51%에 눌리는 독식이 계속된다. 대표는 비례로 뽑고, 결정은 다수결로 하면 된다. 독일처럼 반반 정도 국회를 비례로 하지 않으면 유러피안 모델로의 접근도 어렵다. 정당정치에서 밑에서 시민단체 영향이 반영되고 정치가 균형을 잡으려면, 장기적인 면에서 비례대표 확장 없이는 성공하기 어렵다.
최장집 = 나는 좀 더 온건하게 본다. 박정희 개발독재가 신화로 자리 잡고, 민주화가 정치체제 수준에서는 됐지만 그걸 운영하는 내용은 안됐다. 그 부작용이 축적돼 마지막 단계에서 보는 것이 박근혜 파탄 문제다. 새로운 국가운영 방향과 패러다임을 생각해야 될 때다. 국가중심적인 것이 축소되고, 사회에 대한 국가의 통제가 민주적인 힘들에 의해 제한되고 축소되는 게 필요하다. 사회가 자유주의적이고 다원적인 구조가 됐으면 좋겠다. 보수단체는 해방 후 한국을 건국한 것이 자유민주주의라고 하지만 한국 사회는 자유민주주의와 거리가 멀었다. 그 내용까지 민주화를 못 만들었던 거다. 전부 국가가 앞에 서서 권위주의적으로 끌고온 구조가 달라져야겠다. 모두 대통령에게만 매달리고 위만 보는 거꾸로 된 구조이고, 이긴 쪽이 승자독식하고 야당을 적으로 보는 구조도 변할 때다. 이번 박근혜·최순실 사태와 촛불을 통해 시민들의 시야가 넓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정리 | 김상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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