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주일동안 불펜과 선발을 오갔던 류현진. 그는 롱 릴리버로 던지는 걸 처음에는 강하게 거부했다고 말한다. 자존심 때문이 아닌 루틴의 변화로 부상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는 팀 주치의의 의견 때문이었다.>
방금 세인트루이스에서 출발한 전세기를 타고 밀워키에 도착했습니다. 두 도시의 거리가 가까워서 그런지 55분 정도의 시간이 걸린 것 같아요. 어제에 이어 오늘(6월 2일, 한국시간)도 팀의 아쉬운 연패로 인해 시끌벅적해야 할 기내 안이 조용했습니다.
어제(6월 1일) 카디널스 전에서 승수를 챙기지는 못했지만 나름 열심히 던졌고, 결과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오)승환이 형이 세이브를 올린 건 분명 축하할 일인데 우리 팀의 패배로 축하할 수도 없었네요. 참 묘한 상황이죠? 한국에서 온 투수 두 명이 한쪽은 선발로, 다른 팀에선 마무리로 나온다는 게 자주 볼 수 있는 장면은 아니었으니까요.
일주일 전, 야구 인생에서 매우 특별한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제가 선발이 아닌 중간에 마운드에 올라 공을 던져야 했으니까요. 그동안 자세히 말씀드리지 못했지만 5월 26일 세인트루이스 전에서 마에다 겐타의 뒤를 이어 마운드에 오르기까지 구단과 에이전트, 그리고 전 매우 치열한 대화와 논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구단에서 먼저 롱 릴리프로 보직 변경을 제안했을 때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그렇게는 공을 던질 수 없다고 얘기했고, 수술받고 복귀한 상태에서 중간계투로 내려가는 건 루틴 면에서도 절대 도움이 안 된다는 입장을 전했습니다.
마에다 겐타의 선발 등판이 예정됐던 26일에는 닐 엘라트라체 박사까지 구단 사무실에 나와 사장, 단장, 감독, 코치, 에이전트, 그리고 제가 앉은 자리에서 서로 할 수 있는 얘기는 전부 꺼내 보였던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엘라트라체 박사가 반대 의견을 나타냈는데 구단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 설득시키려고 오랜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나중에는 구단의 결정에 따르지 않을 경우 계약 위반 사항이란 내용도 전달받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구단의 제안을 따라야 했는데 그나마 다행이라면 구단에서 롱 릴리버로 활용하지만 선발투수들처럼 루틴을 맞춰주겠다고 약속한 부분이었습니다.
결정이 내려지면서 26일 6회에 등판하기로 예정됐고, 전 갑자기 등판 준비를 하느라 웨이트트레이닝룸에서 정신없이 몸을 만들었습니다.
만약 제가 정상적인 상태에서 시즌을 보내다 부진한 성적으로 불펜행을 지시받았다면 받아들였을 겁니다. 전 수술 후 복귀한 상태였고, 행여 루틴의 변화로 인해 몸에 무리가 생긴다면 또 다시 부상 위험에 노출될 수 있었던 터라 끝까지 구단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자존심이 상했던 건 아니었습니다. 제가 실력으로 제 존재감을 입증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존심에 상처를 받진 않았어요.부상 위험 때문에 롱 릴리프로 던지는 걸 거부하려 했던 것이죠.
결국 전 경기 중에 몸을 풀러 불펜으로 향했습니다. 그 기분은 여태까지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습니다. 제가 불펜에 모습을 드러내자 주변 관중석에 있던 다저스 팬들이 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아마 그분들도 ‘지금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이지?’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 놀라움은 곧 환호성과 박수로 이어졌고, 제가 불펜에서 공을 던질 때마다 뜨거운 박수를 받기도 했습니다.
드디어 6회, 제 순서가 돌아왔습니다. 마운드를 향해 갈 때는 한없이 복잡했던 마음이 정작 마운드에 오른 순간 평안해졌고, 이후에는 타석의 타자보다는 포수의 미트만 보고 공을 던졌습니다. 많아야 2,3이닝 던질 거라고 예상했는데 로버츠 감독님은 마치 선물처럼 세이브 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경기 후 곤잘레스가 제게 첫 세이브 공을 건네주고 야수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며 더그아웃으로 들어가는데 살짝 울컥하는 마음도 들더라고요.
<5월 26일 세인트루이스 경기에서 세이브를 챙긴 류현진과 그런 그를 격려하는 다저스 선수들.(사진=다저스포토블로그)>
기사제공 류현진 MLB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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