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국적의 귀화 선수, 높은 기량이 오히려 발목 잡아
"한국 선수로 인정할 수 없다"는 KBL 탓에 한국 떠나야 할 운명 처해
7월 도쿄에서 일본과 두 차례 원정 평가전을 치를 대한민국 남자농구 국가대표 12인 최종 명단이 6월4일 발표됐다. 기존 베테랑들이 대부분 빠진 가운데 젊은 선수 대거 발탁이 가장 뚜렷한 특징이었다. 실제로 선발 선수 중 최연장자는 28세 변준형(상무)이다. KBL 5관왕 이정현을 주축으로 신인왕 유기상, 그와 함께 수상을 다퉜던 박무빈·문정현 등이 눈에 띈다. 평균 나이가 24세일 정도로 아주 젊은 영건팀으로 구성됐다.
이번 대표팀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역시 라건아(35·200.5cm)의 공백이다. '선수들이 지나치게 라건아에게만 의지하려 든다'는 평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표팀에서의 그의 존재감은 절대적이었다. 라건아가 있고 없고에 따라 포스트의 무게감이 달라진다. 실제로 이번 대표팀에 라건아의 이름이 올라간다면 충분히 기대감 넘치는 라인업으로 바뀌는 것이 사실이다.
2023년 9월30일 열린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남자 농구 조별리그 D조 대한민국과 일본의 경기에서 라건아가 슛을 시도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가대표로 헌신했는데, 다시 외국인 적용?
아쉽게도 이제는 국가대표팀에서 라건아를 보기 어렵게 됐다. 계약기간이 끝났기 때문인데, 설상가상으로 라건아의 행보조차 불투명한지라 다른 방향으로의 동행 역시 쉽지 않을 전망이다. 2012년 외국인 선수로 KBL에 입성한 그는 탄탄한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한 파워와 빠른 발, 거기에 좋은 체력을 앞세워 리그 최고 선수로 우뚝 섰다.
이후 2018년 법무부 심사를 통해 특별귀화를 인정받았고, 특별수당을 받으며 아시안게임과 세계선수권대회 등에서 태극마크를 달고 맹활약했다. 서장훈·김주성 이후 확실하게 골밑을 지켜줄 빅맨이 아쉬웠던 대표팀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천군만마였다. 국제적으로 이름값은 높지 않았지만 거구의 해외 선수들을 상대로도 좋은 경기력을 보이며 팬들을 열광시켰고 '대한건아'라는 애칭을 얻을 정도로 많은 사랑까지 받았다.
그런 가운데 수년 전부터 팬들 사이에서 오갔던 말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계약기간 종료 후 국내 선수로의 전환이었다. 이미 귀화 시점부터 이에 대한 상호 약속이 이뤄졌고 2024년부터는 국내 선수로 뛸 것이라는 얘기였다. 실제로 몇 년간은 팬들은 물론 기자들 사이에서도 이는 정설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사실과 달랐다. 구두로는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 알 수 없겠지만, 실제 계약서에는 그런 내용이 없었다. '2024년 5월31일 계약 종료 이후 외국인 선수 규정 여부는 이사회 결정에 따른다'는 규정만 명시되어 있을 뿐이다. 결국 당시 계약서를 근거로 이사회가 열렸고, KBL 무대에서는 외국인 선수로 분류된다는 최종 결론이 내려졌다.
그가 한국 국적의 귀화선수임은 맞지만 프로농구 코트에서만큼은 그러한 자격과 권리를 누리지 못한다는 뜻이다. 농구 때문에 귀화했고, 향후 행보 역시 농구와 관련되어 있는 현역 선수가 코트에서 이를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은 사실상 귀화 자체의 의미가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사회에서 그런 결정을 내린 배경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것은 역시 프로농구단 간 '전력 불균형'이다.
지난 챔피언결정전에서 검증됐다시피 라건아의 경기 지배력은 여전히 강력하다. 30대 중반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로 인해 1옵션 외국인 선수로는 쉽지 않겠으나, 2옵션으로 눈높이를 살짝 내려보면 아직 그만한 선수도 없다. 사실상 라건아를 보유한 팀은 외국인 선수 3명을 보유한 가운데 2명을 동시에 코트에 세울 수 있게 되는지라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현재 규정으로는 한 팀당 외국인 선수를 2명만 보유할 수 있다.
팬들은 분노한다. 일단 약속을 했으면 지키는 것이 옳다는 점에서다. 전력 불균형이 생길 수는 있겠으나, 어차피 프로는 경쟁이고 그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강해지는 게 아니냐는 반론이 쏟아졌다. 일본 등 주변 국가는 전력 강화를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특별귀화 문턱을 낮추고 있는데 오히려 우리는 거꾸로 가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실제 최근 아시아 각국에서는 너나 할 것 없이 빼어난 기량의 외국인 선수를 귀화시키는 데 상당한 힘을 쏟고 있다. 폐쇄적인 스탠스를 취하던 중국까지 최근 여기에 동참했을 정도다. 하지만 우리는 말만 무성할 뿐 제자리걸음만 반복하는 실정이다. 라건아 이후를 대비해야 한다는 얘기는 수년 전부터 나왔으나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다.
그나마 라건아 이후의 대체자로 언급되었던 선수로는 지난 시즌 원주 DB의 정규시즌 우승을 이끈 외국인 선수 디드릭 로슨과 과거 대한민국 국가대표로 활약한 혼혈선수 문태종의 아들 재린 스티븐슨(앨라배마대) 등이 있다. 하지만 로슨은 과거 고양 캐롯 시절 체불된 급여를 지금도 받지 못하는 상황에 크게 실망해 KBL을 떠나버렸으며, 스티븐슨 역시 스스로 관심이 있다는 의사를 표시했음에도 아직까지 더 이상 진전된 사안은 없는 상황이다.
"향후 귀화선수 뽑는 데 악영향 끼칠 수도"
스티븐슨에게 국가대표 합류를 처음으로 제의했던 추일승 전 국가대표 감독은 "문태종과 꾸준하게 연락을 하고 지내다 그의 아들이 나날이 기량이 성장하고 있고 미국에서도 유망주로 분류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문태종에게 국가대표 합류 의사를 물어보니 좋다고 했고 이후 아들 스티븐슨 역시 긍정적으로 답변했다"고 말했다.
당사자들은 생각이 있지만 스티븐슨이 대한민국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을 수 있을지는 아쉽게도 미지수다. 서로 어떤 교류도 없이 시간만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다가는 우리 선수라고 생각했던 스티븐슨 역시 놓쳐버릴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나온다. 답답해진 팬들은 해외 무대에서 뛰는 여러 한국계 혼혈선수 및 유망한 외국인 선수 후보들을 스스로 찾아 커뮤니티 등에서 의견을 나눌 정도다. 하지만 정작 농구단체가 움직이지 않는 한 이는 공염불일 뿐이다.
이에 대해 추 전 감독은 "최근 라건아 사태가 향후 귀화선수를 뽑는 데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는 얘기가 많다. 귀화를 원하는 선수마다 원하는 조건과 이유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약속된 바가 있으면 순리대로 지켜지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한다. 좋은 선례가 있어야 다음 과정도 순조롭게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고 의견을 밝혔다.
김종수 스포츠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