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오후 안창호 인권위원장 주재로 열린 제23차 전원위원회는 남규선 상임위원과 원민경·소라미 위원이 공동발의한 ‘대통령의 헌정질서 파괴 비상계엄 선포에 대한 국가인권위원회 직권조사 및 의견표명의 건’(비상계엄 직권조사의 건)을 심의했으나 결론을 내지 못하고 2주 뒤 전원위에 재상정하기로 했다. 직권조사 안건은 공개 심의가 예정돼 있었으나, “자유로운 의사 토론을 위해 비공개 심의하자”는 한석훈 위원의 제안으로 표결 끝에 비공개로 전환해 진행했다.
11일 복수의 인권위 관계자 말을 들어보면, 이날 한석훈 위원은 “판례를 찾아봤더니 전시 사변 또는 국가 비상사태 여부, 공공의 안녕 질서 유지상 필요한 여부는 고도의 정치적 군사 성격을 띤 것이므로 대통령이 그 권한에 의하여 계엄을 선포했다면 그 선포의 당 부당 내지 필요성 여부는 계엄 해제 요구권을 가진 국회만이 이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이고 계엄선포가 당연 무효가 아닌 한 이는 사법심사의 대상이 아니다. 이것이 확립된 판례”라며 “대통령의 계엄선포는 고도의 통치행위이니 사법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이론을 대법원이 받아들인 것”이라고 발언한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1997년 4월 대법원은 전두환·노태우씨의 내란죄 등 재판에서 “계엄선포의 요건 구비 여부나 선포의 당·부당을 판단할 권한이 사법부에는 없다고 할 것이나, 비상계엄의 선포나 확대가 국헌문란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행하여진 경우에는 법원은 그 자체가 범죄 행위에 해당하는지의 여부에 관하여 심사할 수 있다”며 ““사법부가 비상계엄의 유·무죄를 판단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한 위원이 주장한 근거는 내란이 적법했다는 신군부의 논거를 인용한 1980년 대법원 판결이었으나, 이는 1997년 판결로 뒤집혔다.
한 위원은 대통령이 계엄의 적법성에 대한 일차적 판단 주체인 만큼 “대통령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윤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하며 근거로 내세운 야당의 탄핵, 예산 삭감 등을 재차 언급했다고 한다. 이어 인권위의 개입을 ‘한쪽 편을 드는 일’로 표현하기도 했다. 12.3 내란 사태를 ‘정쟁’으로 보며, 인권위의 직권조사와 의견 표명에 부정적 의견을 낸 것이다.
한 위원뿐 아니라 김용원·이충상 위원도 직권조사 및 의견표명 안에 반대했다. 김용원 위원은 이날 전원위 개회 직전 별도 기자회견을 통해 “군 인권침해에 관해서만 직권조사하겠다”고 했고, 이충상 위원은 “타 수사기관 수사절차와의 중복으로 부적절하다. 인권위가 조사 없이 의견표명 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김용직 위원은 “인권위가 비상계엄에 대한 입장을 바로 밝혔어야 했는데,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빨리 의견표명을 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안창호 위원장은 아무런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현재 비상계엄 직권조사 또는 의견표명에 찬성하는 위원은 11명 중 4명뿐이라 다음 전원위에 상정돼도 통과가 불투명하다.
인권위 한 관계자는 “(한석훈 위원이)공개 안건으로 상정된 건을 비공개로 돌리자고 할 때부터 의심이 되었지만, 이처럼 망언을 할 줄은 몰랐다. 이러한 발언을 전원위에서 할 수 있다는 게 놀랍다”면서 “위헌적이고 불법적인 비상계엄으로 전 국민의 인권이 침해당하는 상황에서 조사는커녕 의견표명조차도 전원위에서 결정하지 못하는 것은 인권위의 존재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비상계엄 등 극악무도한 인권침해를 근절하고 재발 방지를 위해 설립한 것이 인권위이고, 권력의 눈치를 보지 말라고 독립적 국가기관으로 설립했는데 그 취지가 무색해졌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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